떠나는 빅초이, 그 파란만장했던 야구인생
OSEN 이선호 기자
발행 2015.10.21 06: 28

'빅초이' 최희섭(36.KIA)이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최희섭은 지난 21일 오전 김기태 감독과 면담을 갖고 은퇴의사를 전했다. 고질적인 허리부상으로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기가 어렵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제 구단의 공식 발표만 남아있다. 광주일고 초고교급 타자에서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타자로 명성을 날렸고 KIA의 10번째 우승을 이끌었던 공로는 이제 역사의 한페이지로 남게 됐다.
1999년 고려대 재학중 시카고 컵스에 입단한 최희섭은 2002년 빅리그 무대를 밟아 한국이 최초의 메이저리그 타자의 영예를 안았다. 3연타석 홈런을 터트리며 올스타 홈런더비에 출전하면서 '빅초이'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수비도중 뒤로 넘어지며 머리를 다친 이후 부진에 빠졌다. 결국 플로리다 마린스, LA 다저스에서 뛰었지만 주전확보에 실패했고 2006년 보스턴으로 이적한 뒤 2007년 방출됐다. 메이저리그 4년 통산 363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5푼, 40홈런, 120타점을 기록했다. 

갈 곳 없었던 그에게 손을 내민 곳은 고향팀 KIA였다. 2007년 KIA는 장타력 부족에 시달리자 최희섭 영입을 계획했고 비밀리에 입단을 제의했다. 그리고 5월 계약금 8억 원, 연봉 3억5000만원, 옵션 4억원 등 총액 15억5000만원에 KIA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입단과 동시에 두산과의 잠실경기에 출전해 구름관중을 몰고왔다. 그러나 첫 경기에서 등부상을 당해 전열에서 이탈했다.입단 첫 해는 52경기에서 타율 3할3푼7리, 7홈런, 46타점을 기록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2008년 최희섭을 향한 기대치는 한껏 높았다. 가을과 스프링캠프까지 충실한 훈련을 한다면 적어도 30홈런 100타점을 올릴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저 꿈에 불과했다. 2008년 2월 스프링캠프에서 한국식 집단 훈련에 거부감을 보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을 호소하며 사실상 훈련을 중단했고 조기귀국했다. 한국의 엄청난 훈련량을 버텨내지 못했다. 결국 부상과 슬럼프에 빠지며 55경기에 얼굴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팬들의 기대가 높은 만큼 최희섭에 대한 실망도 커졌다. 부담을 느낀 최희섭은 절치부심 철저하게 준비해 환골탈태했다. 산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몸을 만들어 최강의 장타자로 돌아왔다. 2009년 131경기에 출전해 3할8리, 33홈런, 100타점을 따내며 KIA 우승을 이끌었다. 김상현과 공포의 CK포를 구축했다. 1루수 골든글러브도 수상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모든 산과 소주한 잔을 하고 싶다"는 이색적인 말을 남겼다.
그러나 절정기는 단 1년이었다. 이듬해는 2010년 126경기 타율 2할8푼6리, 21홈런, 84타점을 올려 기대치를 밑돌았다. CK포의 한축이었던 김상현이 무릎 수술로 이탈하면서 자신에게 견제가 집중되자 주춤했다. 스프링캠프에서 중도 귀국했고 주장 완장도 6개월만에 내놓는 아픔도 겪었다. 이후는 매년 부상에 시달리며 이탈이 잦았다. 대부분 시즌 초반에는 반짝였지만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풀타임을 소화하지 못했다.
2012년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훈련 불참 파동을 일으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선동렬 감독의 배려로 2군에 남아 훈련하면서 명예회복을 노렸지만 역시 부상에 발목이 잡혔다. 2012년 80경기 출전해 2할5푼2리, 7홈런를 기록했고 2013년에도 78경기에서 2할5푼8리, 11홈런에 그쳤다. 급기야 2014년에는 아예 1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실망한 선동렬 감독은 전지훈련부터 기대를 접었고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은퇴위기에 몰렸지만 2014 시즌 종료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선동렬 감독이 물러나고 김기태 감독이 부임하자 가을 마무리 훈련에 참가해 재기를 노렸다. 2월 스프링캠프까지 충실하게 소화했다. 개막 초반 활약을 했지만 고질적인 허리통증을 일으켜 5월 29일 전열에서 이탈했고 끝내 복귀에 실패했다. 8년 통산 634경기, 타율 2할8푼1리, 100홈런, 393타점을 기록했다.
화려하게 빛을 발한 시기도 있었지만 그만큼 그림자도 짙었던 야구인생이었다. KIA에서 9년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타이거즈 통산 10번째 우승을 안겨준 영광의 4번타자였지만 나머지 8년은 미완의 시간이었다. 그를 보면 덩치 큰 소년같은 느낌이 난다. 마음이 약해 주변에 많은 걱정을 안겼지만 막상 이야기를 나누면 서글서글한 면도 있는 밉지 않는 선수였다. 부상으로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을 접는 그가 보석같이 빛나는 제 2의 인생을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sunn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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