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차범근(62)의 아들이었지만 끝은 차두리(35)였다.
차두리가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올해 초 호주와의 아시안컵 결승전을 끝으로 A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던 그는 지난 3월 뉴질랜드전서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었다. 소속팀 서울에서도 대미를 장식했다. 올 시즌 FA컵 우승컵을 품에 안으며 두 번의 준우승(아시아챔피언스리그, FA컵) 여한을 풀었다.
지난 7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C 서울과 수원 삼성의 경기는 시즌 마지막 슈퍼매치이자 차두리의 은퇴식이 열린 날이었다. 수많은 축구인들이 그의 마지막 뒤안길을 배웅했다. 아쉽게도 차두리는 이날 경고 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서울 유니폼을 입고 통산 114경기에 출전해 2골 7도움(K리그, ACL, FA컵)을 기록하며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차두리는 태극마크를 달고 지난 2001년부터 13년 넘게 활약했다. A매치 통산 76경기에 출전해 4골을 넣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와 2010 남아공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을 경험했다. 2015 호주 아시안컵서는 27년 만의 준우승을 함께 했다. 레버쿠젠, 빌레펠트, 프랑크푸르트, 마인츠, 프라이부르크 등 독일 분데스리가 무대에서 10년간 활약했다. 스코틀랜드 명문 셀틱에서는 기성용과 함께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그의 축구 인생은 남부러울 게 없었다.
차두리는 이날 은퇴 기자회견서 "이제야 비로소 진짜 마지막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쁨도 있지만 4~5살 때부터 사랑해왔던 축구를 시작해서 정말로 다시는 그라운드에서 뛸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슬프고 아쉽다"면서도 "열심히 하려고 했고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후회없이 마지막을 마주할 수 있어 굉장히 홀가분하다"고 미소를 지었다.
인고의 시간도 있었다. 자신의 가장 큰 빛이자 동시에 그림자였던 '차범근'의 존재감 때문이다. 차두리의 축구인생 시작은 차범근의 아들이었다. 혹자는 '태어나 보니 차범근 아들'이라며 부러워했다. 기대의 이면엔 시기와 질투가 공존했다. 오롯이 실력으로 증명해야 했다. 홀로 이겨내야 했을, 참으로 힘들었을 시간이다.
차두리는 자신의 축구 인생을 3-5로 표현했다. "축구를 하는 동안 기준은 차범근이라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넘고 싶었고, 그 사람보다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알았다. 유럽을 나가 보니 이 사람이 정말 축구를 잘했다는 걸 깨달았다. 차범근이라는 사람의 근처에도 못가는 선수 생활을 해서 '3-5로 졌다'는 표현을 했다."
차범근은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공격수였다. 지난 1972년부터 1986년까지 14년간 한국을 빛냈다. A매치 통산 135경기서 58골을 터뜨렸다. 한국 선수 A매치 통산 최다골 보유자이자 A매치 통산 최다 출전 2위(1위 홍명보 136경기)의 주인공이다. 그만큼 차범근의 임팩트는 대단했다.
독일 분데스리가 무대에서는 '차붐'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전설적인 공격수로 기억되고 있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와 UEFA컵 등에서 통산 121골을 기록했다. 1980년과 1988년에는 UEFA컵에 입맞춤했다. 20세기 분데스리가를 빛낸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차범근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차두리는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 느꼈다. 유망주였고, 큰 꿈을 안은 어린 선수였기 때문에 겁이 없었다. 뭘 해도 다 될 것처럼 느껴졌다. 25~26살이 지나고 나서 차범근이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3~4년 독일에서 뛰며 강등을 맛 보면서 새삼 아버지의 대단함을 느꼈다. 그 벽을 넘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렇다고 차범근처럼 축구를 잘해야 하는 건 아니니깐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 '너무 좋아해서 시작한 축구를 남들이 한 번이라도 뛰어보고 싶은 분데스리가에서 하고 있는데 자책하고 좌절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즐기려 했다. '왜 안될까보다는 난 왜 이렇게 많은 걸 가졌을까'라는 감사함을 갖고 운동했다"고 말했다.
차두리의 원래 포지션은 아버지와 똑같은 공격수였다. 차범근과 비교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의 숙명이었다. 한일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서 나온 오버헤드킥이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는 '공격수 차두리'다. 그는 빠른 스피드와 압도적인 피지컬을 주무기로 포지션을 변경해 한국을 대표하는 우측 풀백으로 성장했다.
차두리는 "월드컵 4강과 16강의 꿈을 이뤘다. 아버지가 차범근이라서 분데스리가에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펠레나 베켄바워가 아버지라고 해도 기량이 안되면 못가는 곳이 분데스리가다. 빅클럽에서 축구를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축구를 가장 잘한다는 독일에서 10년을 버틴 건 축구를 하면서 얻은 큰 수확이다. 대표팀 생활과 분데스리가 10년의 생활 덕분에 개인적으로 축구인생에서 3골을 넣었다고 생각한다"며 자부심을 나타냈다.

차두리는 선수로서 갖는 마지막 기자회견 말미 이런 말을 남겼다. "아버지는 한국 축구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고, 충분히 박수를 받을만하다. 하지만 서울 팬들에게 만큼은 내가 더 위대한 선수로 남았으면 좋겠다."/dolyng@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