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암고 출신 장성호는 1996년 해태에 입단했다. 2차 1번으로 낙점을 받았으니 해태가 거는 기대치는 높았다. 코끼리 김응룡 감독은 장성호를 1996년 4월 13일 쌍방울과의 광주 개막전에 3번타자 겸 1루수로 출전시켰다. 2루타 2개 포함 4타수 3안타로 화답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프로의 벽은 높았다. 투수들의 변화구와 견제에 말려 부진에 빠졌다. 고졸선수로는 이례적으로 71경기 출전하는 기회를 얻었지만 타율 2할6리, 2홈런, 11타점이 첫 해 성적표였다.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김응룡 감독은 장성호의 무한한 장래성을 눈여겨보았고 본격적으로 조련에 나섰다.
당시 은퇴후 주니치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온 김성한 코치에게 장성호를 맡겼다. 타격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김 코치는 지금의 장성호를 만들었다. 1997년 시즌 중반부터 혹독한 조련이 이어졌고 특유의 외다리타법이 이때 만들어졌다. 눈을 뜨는 시간에는 볼만 때렸고 달렸다. 노력은 1998년 3할1푼2리, 15홈런, 49타점으로 이어졌다.

이후 장성호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스나이퍼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2006년까지 9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다. 2002년 타율 3할4푼3리를 기록해 타격왕에 올랐고 2003년에는 생애 첫 100타점을 기록했다. 2004시즌을 마치고 FA 자격을 얻어 42억 원의 대박을 터트렸다. 타이거즈의 간판타자로 우뚝 섰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하는 타자였다. 가장 빨리 야구장에 나왔고 가장 늦게 야구장을 떠난 노력으로 거둔 결실이었다.
그러나 2007년 3할에 실패하면서 하향곡선을 그었다. 6월 경기도중 슬라이딩을 하다 왼쪽 무릎을 다쳤다. 왼손투수들의 견제와 투수들의 투구모션이 빨라지며 외다리 타법도 벽에 부딪혔다. 특히 2007년 메이저리거 최희섭이 입단하면서 주전 1루수 입지가 좁아졌고 2008년 신인 나지완이 입단하면서 벤치를 지키는 일도 잦아졌다.
2008년 85경기, 2009년 88경기에 그쳤다.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6타석 출전에 그쳤다. 마음속에는 불만이 커졌다. 이적을 결심한 장성호는 그 해를 끝내고 FA 자격을 얻었지만 타 구단의 영입 제의를 받는데 실패했고 1년 계약으로 잔류했다. 계약 당시 트레이드 조항을 넣었고 결국 2010년 6월 한화로 이적하면서 타이거즈와 인연을 마쳤다.
그에게 KIA와의 결별은 회한을 남겼다. 2011년 가을 인터뷰에서 장성호는 "내 목표는 타이거즈에서 2000안타를 치는 것이었다. 아무도 못한 기록이라 욕심이 있었는데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이것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트레이드 당시 타이거즈에서 1741안타를 쳤다. 이후 5년동안 349안타를 추가해 2100안타 고지까지 점령했다. 한화 유니폼을 입고 2012년 9월 18일 포항 삼성전에서 사상 세 번째로 2000안타 고지를 밟았다.
그러나 15년동안 정들었던 타이거즈를 떠나면서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한화에서 3년을 뛰었지만 옛 스승 김응룡 감독이 지휘봉을 잡자마자 롯데로 트레이드 되는 비운을 맛보았다. 2013년과 2014년 롯데에서 88경기에 뛰었고 은퇴위기에 몰리다 조범현 감독의 부름을 받아 kt에 입단해 49경기 출전했으나 부상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은퇴를 선택했다.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우지는 못했다. 2100안타를 쳤지만 어딘가에 진한 아쉬움과 회한이 남은 은퇴였다. 친정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힘있을 때 떠나는게 좋다"는 마음으로 홀연히 떠났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모두 느꼈던 20년. 누구보다도 노력하며 달려온 20년이었다. /sunn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