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무릎을 부여잡았지만 세계 최고라는 자존심은 잊지 않았다. 삼성화재 외국인 선수 괴르기 그로저(32, 200㎝)가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위기의 팀을 구해냈다.
삼성화재는 3일 대전충무체육관에서 열린 대한항공과의 5라운드 경기에서 세트스코어 3-1로 이기고 기사회생했다. 만약 이날 패한다면 3위 대한항공과의 승점차가 10점으로 벌어져 사실상 3위 탈환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던 삼성화재는 이날 배수의 진을 치고 나와 순위 싸움을 좀 더 연장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기량과 정신적 측면에서 구심점 몫을 한 그로저가 있었다. 그로저는 이날 33점을 올리며 삼성화재 공격을 이끌었다.
사실 그로저는 이날 경기에 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경기 전 만난 임도헌 삼성화재 감독은 “그로저가 무릎에 건염을 안고 있다. 어제(2일) 정밀검사 결과 인대에 손상은 없는 상황이지만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라면서 “오늘 오후가 되니 조금 괜찮아졌다고 하더라. 연습을 하면서 출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오늘 경기 출전 판단은 선수에게 맡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올 시즌 득점 1위를 달리고 있는 그로저는 올 시즌 삼성화재의 공격을 절반 이상 점유하고 있다. 여기에 시즌 중반에는 독일 대표팀 소속으로 2016년 리우 올림픽 유럽예선을 뛰느라 장거리 이동도 해야 했다. 아무리 세계 최정상급 공격수라고 하더라도 체력적으로 버거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로저는 지난 1일 한국전력과의 경기에서는 무릎에 통증을 호소하며 코트를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저는 팀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는 이 경기를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만약 이날 삼성화재가 패한다면 사실상 3위 탈환 가능성이 크게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1일 한국전력전에서도 “경기에 뛸 수 있다”라는 사인을 보낸 그로저는 이날 연습 후 경기 출전을 결정했다. 남다른 투혼이었다.
부상을 당한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1세트였다. 여전히 서브는 강력했다. 그로저의 서브 포지션에서 대한항공의 리시브 라인이 크게 흔들리며 연속 득점이 났다. 여기에 중반부터는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세했다. 타점이 가장 좋을 때만은 못한 모습이었지만 강력한 파워와 기술로 기를 올렸다. 세터 유광우도 세트 초반에는 다른 공격수들을 적극 활용하며 그로저의 체력적인 부담을 덜어줬다. 그로저는 1세트에서 공격 성공률 90%를 기록하는 괴력을 발휘하며 10점을 올렸다.
스스로도 이 경기를 많이 의식하는 듯 포효는 평소보다 더 컸다.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법한 삼성화재 동료들의 기를 깨우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역시 무릎 상태는 좋지 않았다. 2세트부터는 공격 성공률이 낮아지기 시작했고 착지 후 통증을 느끼는 표정도 더 일그러졌다. 그로저는 2세트에서도 8점을 올렸으나 공격 성공률은 38.89%로 떨어졌다. 공격 점유율은 69.23%까지 치솟았다.
3세트 들어 힘을 짜낸 그로저는 이날 첫 서브 득점을 성공시키는 등 분전했다. 공격 성공률도 올라왔다. 무릎이 아파 점프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과감한 후위 공격을 시도하는 등 투혼을 불살랐다. 절뚝거리는 무릎은 정상이 아니었지만, 어깨는 살아있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가 또 그로저를 괴롭혔다. 19-12에서 김학민이 공격을 하고 센터 라인을 넘어왔을 때 그로저의 무릎과 부딪힌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저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코트로 들어와 22-15에서 연속 서브 에이스를 꽂아 넣는 등 괴력을 발휘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그로저였지만 서브의 위력은 살아있었다. 4세트 11-14 상황에서 강서브를 퍼부으며 대한항공의 리시브를 흔들었고 이는 팀의 연속 4득점으로 이어지며 순식간에 경기 흐름을 바꿨다. 결국 그로저는 4세트에서도 해결사 몫을 했다. 24-22에서 팀의 승리를 결정짓는 스파이크를 때린 것도 그로저였다. 그로저의 포효는 올 시즌 그 어떤 경기보다 더 컸다. /skullbo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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