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부상 불구 경기 출전 강행
동료 이끄는 리더십까지, '에이스 품격' 과시
점프를 하고 착지할 때마다 찾아오는 고통에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려는 듯 오히려 더 크게 포효했다. 삼성화재 외국인 선수 괴르기 그로저(32)가 세계 최정상급 공격수의 자존심과 더불어 팀을 이끄는 에이스의 품격을 보여줬다. 삼성화재도 그 품격 속에 막판 역전극을 노려볼 수 있게 됐다.

3일 대전충무체육관에서 열린 삼성화재와 대한항공의 경기 후 인터뷰실에 들어온 그로저는 비교적 밝은 표정이었다. 사실 경기 전과는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올 시즌 리그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는 그로저는 최근 무릎에 통증이 생겼고 검진 결과 건염이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인대 손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 다행이지만 통증이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밀검진을 받은 2일에는 훈련도 걸렀다. 말 그대로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임도헌 삼성화재 감독은 3일 경기를 앞두고 그로저에게 “스스로 출전 여부를 결정하라”고 했다. 경기 후 임 감독은 “반신반의였다”라고 고백했다. 사실 몸이 재산인 운동선수가, 그것도 ‘용병 의식’이 강한 외국인 선수가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경기에 나가겠다고 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저는 몇 차례 상태를 점검하더니 “뛰겠다”라는 신호를 보냈다.
팀을 위한 책임감이었다. 그로저는 경기 후 “정말 어려운 경기이기는 했다. 경기 전 워밍업에서 나가서 내가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 내가 경기에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하지만 그런 그로저를 코트 안으로 이끈 것은 책임감이었다. 이날 패할 경우 대한항공에 승점 10점이 뒤져 사실상 3위 탈환이 어려워지는 삼성화재였다. 그로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로저는 “이 경기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무릎에 통증이 있어 타점이나 스텝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지만 그로저는 통증을 참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2세트에서 다소 부진했던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트에서는 해결사 몫을 하며 팀을 이끌었다. 이날 그로저는 양팀 통틀어 가장 많은 33점을 기록하며 삼성화재의 세트스코어 3-1 승리를 이끌었다. 팀은 기사회생했고 그로저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표정에는 팀 승리에 대한 흐뭇함이 잘 드러났다.
이제 그로저는 단순한 외국인 선수가 아닌, 선수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다. 전임자였던 가빈이나 레오도 훌륭한 선수였지만 성품이나 코트 밖 행실 등에서는 오히려 그로저가 더 모범이 되고 의지할 만하다는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유럽에서 오래 뛴 만큼 프로 의식도 투철하다. 그로저는 이날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경기 후 언론 인터뷰에서 모두 임했다.
실제 그로저는 이날 평소보다 더 큰 몸짓으로 동료들에게 기를 불어넣었다. 득점에 성공하면 아픔을 참고 포효했다. 실패하면 그 어느 때보다 자책했으며, 다른 선수들의 득점 성공 때는 자신의 득점마냥 기뻐하며 먼저 다가갔다. 그리고 승리 후에는 누구보다 기뻐했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잡힐 통증이 아닌 만큼 앞으로 어떤 난관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공격수가 ‘세계 정상급 공격수’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순한 투지의 문제가 아닌, 품격의 범주다. /skullbo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