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이 패배한 것이지 인간이 패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세돌 9단이 전 세계에 던진 잊지 못할 말 속에서 인간다운 고뇌가 진하게 느껴졌다. 가슴에 와닿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세돌 9단은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알파고와의 제 3국에서 176수만에 돌을 거뒀다. 이로써 3연속 불계패를 당한 이세돌은 '인공지능' 알파고에 우승을 내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야 했다.

이 9단은 이날 대국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드려야 할 것 같다"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내용이나 승패도 그랬다. 좋은 모습 기대하셨을텐데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드려 정말 죄송하다"고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어 이 9단은 "여러 가지로 알파고 능력을 오판한 것이 많았다"면서 "바둑적으로 여러 가지 경험은 있었으나 이렇게 (웃음) 심한 압박감과 부담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역시 그걸 이겨내는데는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마냥 축제 분위기였다. 우려가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 즐기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뛰어나다지만 아직 바둑은 인간만이 향유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는 이 9단도 마찬가지였다.
구글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 9단은 쏟아지는 관심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 대국들을 통해 대중들이 바둑의 인기를 다시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여겼다. 알파고 자체에 흥미도 느꼈지만 알파고의 학습능력이 인류가 당면한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 9단의 어깨에는 '인류 대표'라는 거대한 짊이 지워졌다. 상대가 형체가 없는 '인공지능'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세돌은 더 이상 바둑 안에 머문 프로기사가 아니었다. 바둑을 넘어 전 세계인의 시선을 받는 국제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이 9단은 세계적인 프로기사답게 이런 분위기에도 의연한 듯 보였다. 항상 상대에 대한 예의를 차리면서도 자신감을 드러냈다. 어떤 질문에도 솔직했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제 1국 바로 전날 가진 기자회견장에서 변화가 생겼다. 구글 딥마인드 데미스 하사비스 최고경영자(CEO)가 알파고의 알고리즘을 소개하자 이를 들은 이 9단은 "조금 긴장해야 할 것 같다"면서 "5-0까지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한판을 지느냐 마느냐 정도가 될 것 같다"던 종전 자신감과 비교하면 한 발 물러선 느낌이었다. 압박과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관심처럼 뜨겁게 고조된 분위기도 이 9단으로서는 다소 생소했다.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이자 구글 지주회사 알파벳 회장이 직접 참관했고 300여명이 넘는 국내외 취재진들이 모였다. 그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관심을 가졌다.
대국장 역시 이 9단으로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가상훈련을 했다지만 막상 형체도 표정도 볼 수 없는 알파고의 대결은 역시 어색했다. 게다가 전에 보지 못한 생소한 알파고의 바둑은 이 9단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상대의 실체가 없는 만큼 카메라는 사실상 이 9단에 맞춰져 있었다. 때문에 이 9단의 조그만 행동, 스치는 표정까지 고스란히 TV 화면으로 전송돼 화제가 됐다. 그것만으로도 형세가 짐작될 정도였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자신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결국 인간이 가진 당연한 한계를 지닌 이 9단으로서는 그런 한계가 없는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오는 압박감과 부담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 9단은 3국까지 패하며 3연패로 우승을 넘겨준 뒤 "오늘의 패배는 이세돌이 패한 것이 인간이 패배한 것이 아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공지능과의 패배를 자신에 국한시킴으로써 인간의 위대함과 희망을 강조했다. 또 자신보다 더 뛰어난 프로기사들이 많은 만큼 스스로를 낮췄다. 결국 인공지능보다는 인간의 두뇌가 더 위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 말이다. 비록 패했지만 기계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역사적인 명언이었다. 바둑, 즉 인간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전 세계인이 공감하게 해 준 말이었다.
거꾸로 따지면 이 9단은 그런 엄청난 압박감과 부담감 속에서도 인공지능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과학자들의 온갖 지식이 총망라돼 있고 수천만 데이터 연산이 가능한 컴퓨터 집합체가 집적돼 있는 알파고를 쏟아지는 주위의 관심과 시선 속에서도 고스란히 받아냈으니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세돌, 그런 그가 아니라면 누가 진정한 인류를 대표할 것인가. 졌지만 감동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인류 대표가 대한민국에 있어줘서 오히려 고마웠다. /letmeout@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