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는 1960년대 실업야구가 13개팀이 분기별 리그를 벌이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고교야구가 60년대 중반부터 최고 인기를 모았습니다.
국내에서 프로야구를 탄생 시키자는 논의가 야구인들 사이에서 거론되면서 1977년 기획안을 만들기도 하다가 전두환의 5공 군사정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됐습니다.
청와대 교육문화 수석비서관 이상주가 당시 “국민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민감하게 작용할 때이므로 프로스포츠를 육성해 관심을 분산 시키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인기있는 축구협회 측에 제안했더니 축구는 정부 지원금 130억원을 지급하면 야간 조명 설치에 시일이 걸린다고 답변했습니다.
야구 측에서는 정부 지원금 36억원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실업야구연맹 사무국장 출신으로 MBC 해설위원이던 이호헌(나중에 KBO 초대사무차장)은 지원금은 없어도 되니 대기업이 하나씩 맡아 구단을 만들고 지역연고제를 실시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부에서는 지역연고제를 하면 국민들의 지역 감정을 조장한다고 우려했지만 야구인 이용일(나중에 KBO 초대 사무총장) 등이 나서서 ’한국프로야구 창립계획서‘를 청와대에 제출했고 대기업 설득에 나선 끝에 1981년 가을에 6개 구단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1982년 12월 11일 창립총회 당시의 프로야구팀은 서울을 본거지로 하는 MBC 방송의 MBC 청룡(초대 감독 백인천), 부산과 경상남도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롯데 자이언츠(초대 감독 박영길),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삼성 라이온즈(초대 감독 서영무), 광주와 전라도 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해태 타이거즈(초대 감독 김동엽), 대전과 충청도를 본거지로 하는 OB 베어즈(초대 감독 김영덕), 강원도 경기도 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삼미 슈퍼스타즈(초대 감독 박현식) 등 6개 팀이었습니다.
그리고 1985년 후기리그부터 인천의 연고팀인 삼미 슈퍼스타는 ‘청보 핀토스’(초대 감독 김진영)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보 핀토스는 다시 1988년 ‘태평양 돌핀스’(초대 감독 김성근)로 팀이 변경되었으며, 1995년에 현대가 팀을 인수, ‘현대 유니콘스’(초대 감독 김재박)가 되었습니다.
6개 구단으로 이어 오던 프로야구는 1986년 대전과 충청남도·충청북도 지역을 연고로 하는 ‘빙그레 이글스’(초대감독 배성서)가 새로 창단, 합류하면서 7개 팀으로 늘어났고, 이때 OB베어즈는 연고지를 서울로 옮겼습니다. 또한 1990년에는 MBC 청룡이 ‘LG 트윈스’로(초대 감독 백인천) 팀이 변경되었습니다.
1991년에는 전라북도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쌍방울 레이더스(초대 감독 김인식)가 프로무대에 진출함으로써 프로야구는 8개 구단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2000년에 이르러 ‘SK 와이번스’(초대 감독 강병철)가 창설됨으로써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의 빈자리를 대신하였습니다.
이후 현대 유니콘스 해체에 이어 2008년 우리히어로즈(초대 감독 이광환)가 뛰어들었고 , 2011년엔 9구단으로 NC 다이노스(초대감독 김경문)가 창단해 2013년부터 1군 리그에, 2014년에는 10구단 kt 위즈(초대 감독 조범현)가 창단돼 1군 리그에 2015년부터 참여하게 됐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젊은이에게는 낭만을---국민들에게는 여가선용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공식 출범한 프로야구는 다음 해인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개막전 MBC 청룡-삼성 라이온즈의 대결로 열리게 됐습니다.
개막전을 찾은 팬은 공식 입장객이 2만3,998명이었지만 관중석은 예매가 끝난 가운데 꽉찼으며 일본에서도 단체 관광객 1,200명이 참석했습니다.
시구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했고 서종철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총재, 시모다 다케소 일본프로야구 커미셔너,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 등 저명 외빈이 한국 프로야구 출범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해태 구단은 출범 당시 선수가 김동엽 감독, 유남호-조창수 코치에 선수 14명만으로 출범했습니다. 다른 구단도 25명에서 30명 가량으로 시작했습니다.
선수 중 최고 연봉은 미국 마이너리그 더블 A 출신의 박철순으로 2,400만원이었고 다음은 해태의 김봉연이 2,000만원이었으며 대부분 1,000만원을 약간 상회했습니다.
당시 물가가 자장면이 400원, 라면이 100원이고 서울 강남의 아파트가 1,500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으로 아마추어 선수의 2~5배가 됐습니다.
6개 구단은 처음에 정규 시즌에 연간 80경기씩 치렀고 다음 해 100경기씩, 1989년에 120경기, 2000년에 133경기를 소화하다가 지난 해부터는 144경기로 늘려 일본과 비슷해졌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은 선수들 숫자가 구단마다 80명 가까이 있으며 연봉은 최고가 김태균(한화)의 15억원인데 프로 입단 9시즌이 지나면 선수 마음대로 이적할 수 있는 FA(자유계약선수) 제도가 1999년에 도입되면서 근래는 정상급 선수들의 몸값이 80억원 이상에 이르렀습니다.

프로의 탄생으로 야구 수준이 높아져 한국야구는 메이저리거 1호인 박찬호가 참석한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전승으로 우승하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강호들이 출전한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회 대회에서 4강, 2회 WBC에서 준우승했습니다. 올림픽에서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일본을 꺾고 동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따내는 등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관중은 1982년 출범 첫해는 정규 시즌에 144만명이 야구장을 찾았고 2012년에 700만명을 돌파했으며 35년이 지난 올해는 800만 시대로 접어 들었습니다.
국내 프로스포츠 종목 중 최고 인기 종목이 된 프로야구의 앞으로 과제는 아직 각 구단이 적자 운영을 하고 모기업의 투자로 꾸려가고 있는데 인기 종목이 된만큼 이제는 자립할 때를 모색해야 합니다. /OSEN 편집고문
[사진]1982년 프로야구 출범 개막전이 열린 동대문야구장/ 출처=KBO연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