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메즈에 유격수 내줘, 절치부심의 겨울
초반 공·수 발군의 활약, SK 버팀목
김성현(29, SK)은 지난해 마무리캠프 당시 “후배들이 유격수 자리를 넘보지 못할 만큼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고 당찬 각오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얼마 되지 않아 꺾였다. SK는 개막 주전 유격수로 외국인 선수 헥터 고메즈를 낙점했다.

고메즈의 수비가 더 뛰어나다는 판단 아래 내린 결정이었다. 김성현은 2루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나쁘게 말하면 밀려났다. 겉으로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나름대로 팀의 주전 유격수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김성현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도 쉽지 않아 더 아쉬웠다. 김성현은 캠프 당시 “고메즈의 수비가 좋다”라고 인정하면서도 평소와는 다른 각오를 숨기지 않았다. 김성현은 “실력으로 자리를 다시 되찾아오겠다”라고 했다.
사실 김용희 SK 감독도 고민이 많았다. 그냥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팀의 미래도 생각해야 했다. 고메즈는 외국인 신분이다. 내년에도 SK에 남아 있을지, 다른 팀을 찾아 떠날지, 혹은 퇴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 선수에게 팀 내야의 핵심이자 사령관 임무를 하는 유격수 자리를 맡긴다는 것 자체가 고민이었다.
그래서 플랜B도 생각했다. 오키나와 연습경기에서 김성현에게도 유격수로 뛸 기회를 줬다. 경기 중반 이후 고메즈가 교체돼 나가면 김성현이 유격수 자리에 들어와 수비를 했다. 김 감독은 “감각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싶다”라고 설명하면서 “독이 없으면 독사가 아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김성현이 실력으로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런 김성현은 2루 자리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공·수 모두에서 100점 활약이다. 김성현은 8일까지 7경기에 나가 타율 3할9푼1리의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전반적으로 초반 타격감이 저조한 SK에서 이재원과 함께 가장 활약이 좋은 선수로 뽑힌다. 수비에서도 안정감 넘치는 활약이다. 실책은 하나도 없었고 불안한 플레이조차 없었다. 오히려 유격수 자리에서 갈고 닦은 넓은 수비 반경을 바탕으로 호수비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실 시범경기까지는 공·수 모두에서 고민이 많았던 김성현이다. 중반까지는 방망이가 안 맞았다. 수비에서의 스트레스가 이유 중 하나였다. 2루에서도 실책이 자주 나왔다. 스스로 납득이 안 되는 장면들도 있었다. 2루 경험이 없는 선수는 아니지만 최근 2년간 2루 수비는 거의 나선 적이 없었다. 유격수에서 2루로 가면 수비가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작이 완전히 반대다. 글러브를 갖다 대는 방향마저도 반대다. 적응 시간은 필요했다.
그런 김성현은 경기 후 특별 수비 훈련을 하면서 다시 독기를 품었다. 경기에서 빠질 때도 있었지만 기죽지 않고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위축된 것이 문제라는 주위의 조언도 새겼다. 후쿠하라, 박진만 코치의 강훈련 속에 차분히 마음을 다잡으며 개막을 준비했다. 그 결과 시즌 초반은 순항이다.
오히려 SK는 고메즈가 불안하다. 고메즈는 7경기에서 타율이 1할4푼8리에 불과하다. 여기에 실책도 벌써 3개나 나왔다. 어깨는 KBO 리그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초반에는 송구 정확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은 있지만 계속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유격수 김성현’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릴 수도 있다. 혼란을 딛고 일어선 지난해 후반기 수비는 나무랄 곳이 없었던 김성현이다. 김성현이 자리를 되찾을 자격이 있음을 서서히 증명해가고 있다. /skullbo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