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시네마]'트릭' 이정진X강예원, 잘 빠진 심리극의 탄생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6.07.13 09: 10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1991년 12월 9일 SBS TV가 개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보다 1년 전 개국한 EBS를 제외하면 국내 지상파방송 TV 채널은 KBS MBC 단 두 곳이었다. 본격적인 트로이카 체제가 시작된 지 4년 만인 1995년 3월 1일 20개 채널의 케이블TV 시대가 열린 뒤 20여년 만에 이제 200개도 넘는 채널이 생겼고 일부 채널은 지상파 방송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시청자가 보고 싶은 시간에 선택한 프로그램만 볼 수 있는 IPTV의 대중화로 이제 다양한 플랫폼이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등한 경쟁을 벌이는 방송의 춘추전국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다 플랫폼, 다 채널의 시대는 순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큰 역기능은 지나친 시청률 경쟁이 낳은 프로그램의 ‘자극성’과 ‘조작’이다. 시청자들의 일부 종합편성채널과 지상파 방송사에 대한 불신에서 보듯 특정 권력층과의 결탁에 의한 여론조작 의도가 강력하게 의심받고 있는 폐단 또한 현실이다.

영화 ‘트릭’은 바로 그 영향력만큼이나 진실여부완 상관없이 여론을 의도한 대로 몰아갔고, 지금도 그럴 수 있는 방송사의 천박한 이기주의와 언론사로서의 사명을 잊은 도덕불감증을 폭로한다.
10여년 전 비성푸드 대표가 한강에 투신자살한다. 유력 방송사에서 쓰레기 만두를 탐사보도해 파문이 일었고 그 회사가 바로 비성푸드였다. 회사는 망한다. 하지만 관계 당국의 조사 결과 보도는 허위로 드러났고 방송사는 이를 보도한 기자 석진(이정진)을 자방 계열사 한직으로 내려 보내는 징계를 한다.
2015년 간신히 본사로 올라온 석진은 교양국 PD로서 성공을 위해 안간힘을 쓴 끝에 스타 연출가로 성장해있다. 때마침 젊은 한광철이 새 사장으로 부임하고 여론은 ‘낙하산’이라고 비난하자 한 사장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석진을 불러 보도국 복귀를 미끼로 ‘한방’을 주문한다. 석진은 경영위기에 몰린 수안병원장(장윤정)과 결탁해 이 병원에 입원 중인 폐암 말기 환자 도준(김태훈)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작정하고 도준과 영애(강예원)를 만나 허락을 받아낸다.
방송은 대성공이었다. 한 자리 수로 시작된 시청률은 회를 거듭할수록 상승해 10%대 20%대를 찍고 어느덧 도준과 영애는 스타덤에 오른다. 그럴 즈음 한 사장은 석진을 불러 ‘빅 딜’을 제안한다. 시청률 35%를 찍으면 보도국장에 임명하겠다는 것.
세 주인공의 심리 드라마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마치 극 중 극을 보는 듯한 입체적 구조의 연극적 구성으로 펼쳐지는 가운데 어느덧 서스펜스 드라마로 바뀌더니 충격적인 반전의 결말로 섬뜩한 스릴러의 형식으로 매조진다.
대중은 최근에만 해도 한 유명 탐사보도 스타 PD의 조작방송 의혹과 이로 인한 장본인의 몰락을 두 눈 똑똑히 치켜뜨고 봐왔다. 그 외에도 각종 선거 및 유력인사 관련 보도에서 미심쩍은 느낌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신문과 포털사이트에 대문짝만 하게 대중의 관심을 끄는 뉴스가 올라오면 순진하거나 무지한 사람은 곧이곧대로 믿지만 삐딱한 성향을 가졌거나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면 의심하거나 바로 진실을 눈치 채기 마련이다.
사실 석진의 행위는 시청률 조작이라기 보단 시청률 상승을 위한 연출에 가깝다. 다만 곧 죽을 말기암 환자의 짧은 여생에 대한 행복추구권과 그의 아내의 내면에 잠재된 욕망을 이용해 프로그램을 조작한 점에선 심각한 모럴 해저드를 지적받고 그에 대한 징계를 받아야 마땅하다. 오히려 10여년 전 오보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대표이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행위가 더 큰 범죄행위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석진과 한 사장의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모르는 어긋난 욕망과 그 자제할 줄 모르는 질주가 방송사를 얼마나 부패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가운데 곧 죽을 것을 알지만 그나마 편하게 살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죽음 뒤 아내의 행복을 어떻게라도 보장해주기 위한 도준의 애처러운 순애보와 그에 반해 점점 매스미디어의 최음제에 음탕하게 변해가는 영애의 인면수심을 대치시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부도덕성을 경고한다.
1993년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수단에서 찍은 ‘독수리와 소녀’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지만 1년 뒤 “아이를 안아주지 못한 내가 부끄럽다”며 자살했다. 그가 아이를 구하지 못한 이유는 어느 정도 타당했지만 여론은 그렇지 못했다.
드라마 ‘피노키오’에서 보도전문방송사 수습기자 인하(박신혜)는 한겨울 빙판지역 취재현장에서 사수(선배기자)에게 “이걸 찍을 게 아니라 연탄재라도 뿌려서 다칠 사람들을 미리 구하는 게 옳지 않냐”고 물었다가 호되게 야단맞는다. 사수는 “그렇게 되면 몇 사람은 구할 수 있지만 전국적인 이런 재난을 막을 순 없다”며 “이 보도로 인해 국민은 물론 전국의 해당 공무원들이 사소하거나 중차대한 자연재해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고 국민 보호에 앞장서게 됨으로써 향후 일어날 재난에 대한 전국적인 예방이 이뤄질 것”이라고 언론인의 사명과 사회공헌에 대해 알아듣게 설명한다. 케빈 카터는 그런 생각을 가졌을 것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듯하다.
그런데 ‘트릭’은 다르다. 암에 걸린 젊은 남편과 그를 간호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게 전파를 타면서 돈과 유명세를 모두 얻게 된 아내, 그리고 이런 그들의 삶에 연출을 더해 출세를 거머쥔 PD의 행위는 언론의 사명이나 보도의 본질과는 차원이 다르다.
방송사는 신문사와 달리 보도 외에도 오락과 정보의 기능이 강하다. 사실 비중도 엄청나게 차이난다. 지상파 방송사의 방송시간 중 정통 보도프로그램 방송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석진이 욕망의 괴물이 돼갈수록 스태프의 피로는 가중된다. 촬영 중 한 카메라맨이 졸다가 넘어지는 장면은 웃음의 코드가 아니라 시청률 경쟁이 마치 전쟁 같은 방송의 현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KBS2 ‘함부로 애틋하게’에서 다큐멘터리 PD 노을(배수지)은 촌지를 받은 사실이 알려지자 선배의 ‘범행’을 폭로하며 ‘그게 뭐 어때서’라는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트릭’에서 석진은 환자 부부에게 협찬상품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병원장으로부터 두툼한 봉투도 받는다.
‘트릭’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방송 혹은 미디어의 이면에 도사린 다양한 군상들의 추악한 욕망이다. 곧 죽을 도준은 헌신적인 아내를 배신하고 처음 만난 여인과 정신적인 사랑을 나눈다. 1년을 살아도 잘 사는 것과, 100년을 살아도 잘못 사는 것 중 뭣이 중할까?
각 시퀀스와 이를 종합한 플롯은 매우 탄탄하다. 특히 담배를 쥔 손의 미세한 떨림조차 디테일하게 소화해낸 김태훈의 연기력은 엄청난 발견이다. 그러나 반전에 이르는 내러티브는 전형적인 상업적 서스펜스의 클리셰라 다소 허무하지만 뛰어난 심리 묘사가 단연 돋보인다. /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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