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크린에 옮겨질 정도로 많은 이들의 가슴과 뇌리 속에 남아있는걸까.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지난 27일 개봉,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흥행 청신호를 켰다.
특히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첩보전,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작전을 다루며 실제 사건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 역시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인천상륙작전'이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전쟁 영화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인천상륙작전'은 첩보 영화에 가깝다. 맥아더 장군을 도와 UN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끔 도운 8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극 중 이정재는 첩보 작전, 일명 엑스레이(X-RAY) 작전의 수장 장학수로 등장해 긴장감 넘치는 스릴을 선사한다. 이 엑스레이 작전은 실제로 존재했던 작전.
1950년 8월 당시 22살이었던 함명수 소령과 17명의 청년들은 엑스레이 작전에 투입,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에 잠입한 뒤 북한군 해안포대 위치와 수, 병력 배치 등 고급 정보를 수집해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고, 맥아더 장군은 이를 토대로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이 "한국 해군을 다시 보게 됐다"고 말할 정도로 함명수 소령이 이끈 첩보전 엑스레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가장 큰 요인이 됐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첩보대원들은 철수 명령을 받았지만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를 기습하면서 전투가 벌어졌고 이때 해군 첩보대원이었던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적을 유인해 다른 부대원들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탈출하지 못하고 적에게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총으로 자결, 이는 포로가 될 경우 인천상륙작전이 탄로날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에 정부는 1954년 이들에게 을지무공훈장을, 미국은 1953년 7월 은성 훈장을 수여했으며 해군은 두 사람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도탄 고속함 10번함을 임병래함으로 11번함은 홍시욱함으로 제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의 작전 덕분에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시동을 걸었다. 오전 6시, 한-미 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을 시작, 작전 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냈으며 이후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은 공격을 감행해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게 됐다.
마지막으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7일 정오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은 성공리에 마무리될 수 있었다. / trio88@osen.co.kr
[사진] '인천상륙작전'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