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트윈스 내야수 정성훈(36)이 자신의 야구인생을 돌아봤다.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정성훈이지만 2000안타를 두고 회상에 잠겼다. 정성훈은 지난 28일 잠실 kt전에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 KBO리그 통산 7번째 대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대업을 이뤘으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정성훈은 “2000안타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솔직히 이렇게 오랫동안 야구하고 있는 것도 신기하다. 예전부터 수차례 야구를 그만두려 했었다. 그런 내가 2000안타라니...참 오래살고 볼 일이다”며 말문을 열었다.
시작은 어머니의 손이었다. 정성훈은 “어린 시절 뛰어 노는 것을 워낙 좋아하긴 했다. 당시 어머니가 내 사주를 보셨는데 공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어느 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야구부에 들어가게 됐다”고 야구 인생의 출발점은 밝혔다.

지금은 리그 정상급 우타자로 올라섰지만 고난과 함께 야구인생이 시작됐다. 정성훈은 “솔직히 하나도 재미없고 힘들기만 했다. 전학하면서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학교도 굉장히 멀었다. 야구부에 들어간 그 날부터 매일 ‘그만둬야 겠다’는 생각만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광주일고 진학 후 야구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정성훈은 “어쩌다보니 고등학교까지 계속 야구를 하게 됐다. 그 때부터 조금씩 재미도 찾아갔다. 몸은 힘들었지만, 고등학교 시절 계속 팀이 승리하면서 기쁨도 느꼈다. 광주일고 당시 (김)병현이 형, (최)희섭이 형 등 쟁쟁한 선수들이 참 많았다. 매 경기 승리했기 때문에, 훈련은 힘들어도 경기 자체는 재미있었다. 그래도 설마 내가 프로에 갈 줄은 몰랐었다”고 말했다.
고교시절 최고 내야수였던 정성훈은 1999년 1차 지명으로 해태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 계약금 1억5000만원을 받으며 이종범 이후 가장 다재다능한 내야수란 평가를 받았다.
정성훈은 “원래 대학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야구 이외에 것도 생각해보려 했다. 그런데 입학 조건이 어긋나면서 프로에 가게 됐다”며 “프로에 가니까 그야말로 지옥이더라. 입단 후 2년 동안 코치님 손에 이끌려 하루 종일 연습만 했다. 이때 진짜 야구를 그만두려 했었다. 구단에 그만두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자 구단에선 그만두면 계약금을 반환해야 한다고 하더라. 부모님께 이야기하니 계약금을 다시 낼 수 있는 집안형편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 야구를 했다”고 웃었다.
힘든 시간을 보낸 만큼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입단 첫 해인 1999시즌부터 108경기에 출장했고, 유격수에서 3루수로 포지션을 바꾸면서 팀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2003년 KIA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된 후 리그 정상급 내야수가 됐다. 현대 왕조의 한 축을 이뤘고, 우승의 기쁨까지 맛봤다.
행운까지 따르며 국가대표 태극마크도 달았다. 군 복무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대체요원으로 제1회 WBC 국가대표에 뽑힌 것이다. 당시 대표팀에는 김동주가 주전 3루수로 자리했으나, WBC 1라운드에서 김동주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가 어깨 부상으로 이탈했다. 정성훈이 김동주를 대신해 대회에 참여했고, 대표팀은 메이저리그 올스타로 구성된 미국을 꺾고 준결승까지 올랐다. 당시 대표팀 멤버들은 군면제 혜택을 받았다.
정성훈은 “군 입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행운이 찾아왔다. 사실 어머니께서 당시에도 사주를 봤는데 내 운명에 군대가 없다고 하시더라. 전혀 믿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국가대표로 뽑히게 됐다. 대표팀에 뽑힐 때까지만 해도 군 면제는 생각도 안 했었다. 야구를 계속하다보니 운이 찾아왔다”고 이야기했다.
정성훈은 2008년 겨울 FA 자격을 얻고, LG로 이적했다. LG의 FA 잔혹사를 끊었고, 꾸준한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2012년 겨울 다시 FA가 됐었던 정성훈은 "배신자가 될 수는 없었다. LG에서 좋은 성적을 내 더 큰 기쁨을 느껴보고 싶다"며 다시 LG 유니폼을 입었다. 실제로 정성훈은 2013시즌 LG가 11년 만의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1안타를 기록 중인 정성훈은 홍성흔(2046안타)을 넘어 역대 우타자 최다안타를 응시 중이다. / drjose7@os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