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한국 여자야구를 괄시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4일 기장-현대차 드림볼파크에서 'LG 후원 WBSC(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 2016 기장여자야구월드컵' A조 예선 2차전 쿠바를 4-3으로 꺾은 뒤 대표팀을 맡은 이광환 감독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한국대표팀은 이날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각 조 상위 2팀에 주어지는 슈퍼라운드 진출권을 획득했다.
그동안 감내했던 힘겨운 시간들을 털어버린 듯 했다. 한국여자야구는 척박한 토양 속에서 고군분투 해왔다. 그 선봉에 서 있던 게 이광환 감독이다. 이광환 감독은 한국여자야구계의 선구자와 같다. 한국여자야구연맹의 산파 노릇을 한 것도 이 감독이다.

하지만 이광환 감독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인적 인프라'였다. 현재 한국여자야구는 변변한 실업팀 조차 없다. 대부분 동호회 팀이다. 세계랭킹 역시 11위다. 세계랭킹 12위까지 참가하는데 한국은 최하위권에 속해 있다.
한국여자야구 선수들은 대부분 자신의 본업을 갖고 야구를 병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3일 A조 첫 경기 파키스탄전에 선발 투수로 나섰던 강정희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대표팀의 주장 곽대이 역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이광환 감독은 "월드컵 경기가 주말에 열려서 다행인데, 월요일부터는 선수들이 다시 출근하기를 원하는 회사들이 있다"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웃음 속에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물론 현재 대표팀 선수들은 계속해서 국제대회를 즐기고 싶어한다.
이번 대표팀 역시 생업에 종사하는 선수들 때문에 주중을 피해 주말에 연습을 하다 대회 직전에야 겨우 소집됐다. 사실 대표팀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럽다.
결국 한국여자야구의 얕은 저변과 현실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이광환 감독은 여자 소프트볼과 여자야구의 현실을 비교하면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 감독은 "한국 여자소프트볼의 수준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슷하다"면서 "소프트볼 선수들은 대부분 지역을 대표하는 팀에 소속이 되어 있다. 전국체전에도 나간다. 연봉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소프트볼 선수들이 받는 연봉은 대략 3000만 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서 이 감독은 "체계적으로 연습을 할 수 있고 소프트볼과 야구의 매커니즘이 비슷하기 때문에 기본기도 탄탄하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연습을 치르지 못한 상황에서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의 성적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이광환 감독과 여자야구연맹이 대한소프트볼협회에 도움을 청해 소프트볼 선수들을 대거 합류시킨 배경이다.
이번 대표팀의 엔트리 20명 가운데 12명이 소프트볼 선수이고 8명이 여자야구선수다. 야수들 대부분이 소프트볼 선수이고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소프트볼 대표팀에도 포함된 선수들도 더러 있다. 4일 쿠바전 결승타를 친 양이슬과 승리 투수가 된 재일교포 출신 배유가 모두 소프트볼 대표팀이다.
혹자들은 '반쪽 대표팀'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내에서 국제대회가 열리는 것만으로도 여자야구에 대한 인식은 재고될 수 있고, 인지도 역시 높일 수 있다. 여자야구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 저변 확대라고 간절하게 믿고 있는 게 이광환 감독이다.
이광환 감독의 "한국여자야구를 이제 괄시하지 못할 것이다"는 말은 그동안 야구월드컵에 초청 받지 못해던 한국여자야구의 설움을 내뱉은 말이기도 했고, 한국여자야구를 조금 더 성장시키겠다는 이 감독의 의지 표현이기도 했다.
'이광환호'의 대표팀이 가졌던 1차 목표인 슈퍼라운드 진출은 이뤄냈다. 척박한 토양에서 일궈낸 작은 기적이다. 이제 '이광환호'는 현실의 어려움을 딛고 더 큰 기적을 꿈꾸고 있다. /jhra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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