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의 SK랩북] ‘망가진 힐만’ SK의 새 10년을 상징하다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7.05.28 06: 31

“니혼햄 시절 일본시리즈 우승 퍼레이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지금 당장 구상을 말하기는 이르지만 팬들과 호흡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꼭 실천할 수 있도록 하겠다” (오키나와 전지훈련 당시 트레이 힐만 감독)
트레이 힐만 SK 감독은 니혼햄 시절 ‘팬 친화적’인 감독으로 유명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선수들에게 적극적인 팬 서비스를 강조했다. 뒤로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이를 실천했다. 지금도 약간 그런 문화가 남아있지만, 일본에서 야구는 ‘신성화’의 대상이다. 감독은 고사하고 선수들과 접촉할 기회조차 많지 않았다. 그런 당시 토양에서 힐만 감독의 ‘팬 퍼스트’는 신선한 충격을 일으켰다.
그랬던 힐만 감독이 한국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실천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27일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서 가장 바쁜 인물은 다름 아닌 힐만 감독이었다. 힐만 감독은 이날 ‘스포테인먼트 10주년’ 행사를 기념해 경기 전에는 팬 사인회를 열었다. 백미는 경기가 끝난 뒤였다. 배우 김보성 씨의 분장(?)을 한 힐만 감독은 1루 응원단상에 올라 ‘의리!’를 외치며 발차기까지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독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그 인물은 선수·팬들과 SK의 대표적 응원가인 ‘연안부두’까지 함께 불렀다.

힐만의 철학,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다
훈련 전까지 가사를 외웠다는 힐만 감독의 철학은 명확하다. “팬이 없는 곳에 프로야구는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팬들이 유료TV 시청, 비싼 티켓 값을 감수하며 구단의 재정을 충당하는 전형적인 메이저리그(MLB)식 사고다. 이런 힐만 감독의 철학은 감독 후보 인터뷰 당시부터 SK 관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막상 시즌에 들어가 바쁘면 말이 달라지지는 않을까”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기우였다. 이날 모습은 KBO 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이벤트였다.
대단히 의욕적이었다는 게 구단 관계자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다. 먼저 자신이 입을 의상과 컨셉을 직접 고르고 구단에 제안했다는 이야기는 한동안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다만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미지라 구단이 친숙한 이미지로 손을 봤는데 힐만 감독은 그 캐릭터까지 꼼꼼하게 분석해 팬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한 관계자는 “만약 이날 경기에서 졌어도 힐만 감독의 이런 서비스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투철한 프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KBO 리그에서 감독들은 보통 이런 행사에 둔감하다. 약간의 권위, 혹은 약간의 두려움과 맞닿아 있다. 심지어 “감독이 연예인이 되어서야 되겠는가”라며 반감을 가지는 지도자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힐만 감독은 그런 게 없다. 자신을 상품화시키는 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구단에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OK”다. 설사 이날처럼 자신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도 힐만 감독은 그것이 감독의 권위를 깎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친숙한 모습으로 구단의 이미지를 개선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열혈 감독’의 의지 속에 선수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날 경기를 앞두고 ‘분장’의 주인공이 된 선수들과 그렇지 않은 선수들의 희비는 엇갈렸다. 구단이 준비한 의상에 킥킥거린 선수들이 많았다는 후문이다. “어떻게 이걸 입고 응원단상에 올라가나”며 난감해 한 선수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팀의 간판급 선수라고 할 수 있는 최정과 윤희상부터 솔선수범해 결과적으로 멋진 대열이 만들어졌다.
선수단 의식변화, 이제는 마케팅 첨병으로
최정은 아이언맨 복장을 했다. 누구인지 알기도 어려울 정도로 전신 슈트를 착용했다. 평소 최정의 성격을 생각할 때 구단 관계자들조차 깜짝 놀랐다. 윤희상은 드라마 ‘도깨비’를 패러디했다. 가슴에 칼을 꽂았고, 가슴 속에서 실제 무선 ‘공유기’를 꺼내 단상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김동엽은 캡틴 아메리카 복장을, 한동민은 김무스 패러디, 김주한은 PPAP로 변했다. 한동민은 노래를 불렀고, 김주한은 원조 뺨칠 정도의 멋진 춤을 선보였다.
의미가 큰 대목이었다. 그간 이런 행사는 주로 프런트 주도였다. 선수단은 빠져 있었다. 마지못해 몇몇 선수가 얼굴마담으로 나서는 형식이었다. 물론 프런트가 선수단을 섭외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장 입김이 센 KBO 리그의 정서상 현장이 난색을 표하면 방법이 없었다. “선수들의 경기력에 방해가 된다. 행사 참여는 최소화 해달라”며 대놓고 반대를 표하는 코칭스태프도 여전히 많다. 하지만 이날은 프런트가 깔아 놓은 판에 힐만 감독이 선수들을 끌고 직접 들어왔다.
선수들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SK는 일찌감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구축에 공을 들인 구단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게시판보다는 SNS를 활용해 소식 및 영상을 실시간으로 쌍방향 소통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구단 공식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SKwyverns)이나 팀 공식 마스코트인 아테나 페이스북 홈페이지(https://www.facebook.com/아테나-1417586818294247)를 통해 많은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콘텐츠를 제작하려면 역시 팀 내 최고 가치를 지닌 선수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간단한 인터뷰조차 고사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러한 구단의 마케팅 방향을 이해하고 섭외 요청에는 군말 없이 따르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팀 내에 젊은 선수들이 조금씩 늘어가면서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사라진 점도 있다. 일례로 화제의 프로그램인 ‘마춘텔’에서 “한 경기 2개의 홈런을 치면 단상에서 클럽댄스를 선보이겠다”고 공약을 건 한동민은 그 약속을 ‘제대로’ 지켰다. 팬들은 한동민의 색다른 모습과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팬들의 사랑과 충성심으로 이어진다.
‘마케팅+성적’ 두 토끼, 힐만의 진짜 야심
힐만 감독은 선수단의 일정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앞으로도 구단 마케팅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생각이다. 힐만 감독은 캠프 당시부터 취재진과의 대화에서 이에 대해 자주 묻는 편이다. SK 팬들의 성향은 어떤지, SK의 팬 베이스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혹은 SK 팬들이 구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단 관계자들보다는 취재진이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인천야구의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SK의 팬 베이스는 상대적으로 두껍지 않다. ‘인기구단’이 아니라는 것은 SK 팬들도 인정을 한다. 하지만 충성심은 다른 팀에 못지않다. 특히 최근 한국시리즈 3회 우승 및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상대적으로 세련된 마케팅 행사나 경기장 시설, 상대적으로 적었던 선수단 사건사고 등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힐만 감독은 결국 이 자부심을 고취시키려면 성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연고 이전 직후 고생이 심했던 니혼햄 감독 시절 터득한 부분이다.
힐만 감독은 “한창 성적이 좋았을 때는 연간 100만 관중을 동원한 적도 있었다. 이는 다른 인기구단들과 견줘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성적이었다. 그러나 성적이 떨어지면서 관중수도 하락 추세에 있다. 성적이 따라오지 않는 구단 마케팅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기자의 말에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절대적으로 동의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니혼햄과 캔자스시티라는, 상대적으로 비인기팀-스몰 마켓에서 감독을 경험했던 힐만 감독은 그 방향성을 잘 알고 있을 법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난 유한 이미지와는 달리, 힐만 감독은 성적이라는 나머지 한 토끼에 더 필사적이다. 당장의 성적은 물론 장기적인 비전도 함께 바라보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이 왜 SK가 자신에게 역대 감독 최고 연봉을 준 이유인지를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두 차례나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스포테인먼트 10주년의 행사에서, '망가진' 힐만 감독은 앞으로의 10년 방향을 제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 좋은 성적표를 가지고 더 팬들에게 다가서겠다는 다짐이다. /SK 담당기자 skullboy@osen.co.kr
[사진] SK 와이번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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