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쟤 타격이 좀 좋아졌는데?”
송태일 현 SK 육성그룹장은 스카우트 재직 시절이었던 2011년 가을, 경성대 야구장을 찾았다. 공식경기는 아니었는데 연습경기가 있다는 이야기에 뭐라도 홀린 듯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기가 막히게 타격을 하는 선수가 있었다. 잡아 당기기도 하고, 밀어치기도 했다.
낯선 선수는 아니었다. 좌타로 발도 빠르고, 컨택도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아 익히 알려진 선수였다. 그러나 대학교 4학년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 각 구단의 지명 리스트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고3병’ 보다도 더 지독하다는, 이른바 ‘대4병’에 걸린 선수였다.

송 그룹장은 “대학 1~2학년 때는 엄청나게 잘 치던 선수였다. 그런데 4학년 때 너무 부진했다. '쟤 왜 그럴까'라는 이야기가 많았던 선수”면서 “그런데 그 연습경기에서 참 잘 쳤다. 좋을 때의 모습이 보였다”고 회상했다. SK에 지명을 받으라는 하늘의 계시였을까. 송 그룹장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홀로 야간훈련을 하는 이 선수를 우연찮게 보고 감명을 받았다. 성실함은 물론 인성도 좋다는 것은 미리 확인한 터였다.
이러한 긍정적인 보고가 담긴 리포트는 고위층으로 올라갔고, SK는 2012년 신인드래프트 9라운드(전체 85순위)에서 이 선수를 지명했다. 다른 팀들이 “SK가 하위 라운드에서 도박을 했다”고 평가했던 지명이었다. 비웃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그 선수는, 정확히 7년 뒤 30홈런과 100타점을 모두 달성한 타자로 성장했다. 한동민(29·SK)이 이 극적인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한 번의 연습경기, 인생을 바꾸다
한동민은 대학교 4학년 때 부진했던 것에 대해 “부담이 너무 컸다”고 담담하게 떠올린다. 한동민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19세에 이미 한 차례 큰 실패를 경험했다. 스카우트들에게 뭔가 어필할 수 있는 확실한 장점이 없었던 탓이다. 힘이 좋은 것도, 정확한 타격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아주 발이 빠른 것도 아니었다. 자연히 대학교 4학년 때는 지명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 한동민은 “지금에 비하면 참 멘탈이 약했던 시기”라고 웃는다.
“고등학교는 대학이라는 대안이 있었지만, 그때는 더 도망갈 곳이 없었다. 무조건 승부를 봐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부담이 너무 컸다. 1~3학년 때까지는 그래도 평균 이상은 하는 타자였다. 1학년 때는 리그에서 홈런도 가장 많이 쳤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4학년 때 연습량을 더 많이 가져간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부담감도 컸다. 이상하게 목동(전국대회가 열리는 구장)에만 가면 경기가 안 풀렸다”

지명 가능성에 스스로조차 확신을 갖지 못했던 한동민은 그렇게 극적인 기회를 얻었다. 한동민은 “SK 스카우트분이 연습경기를 봤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연습경기라 그날 부담이 없어 타격이 잘 됐다. 대학은 취침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야간 훈련을 하는 모습을 어떻게 또 보신 모양이더라. 어떻게 보면 지명은 재수가 좋았던 것”이라며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그 연습경기를 떠올렸다.
약간 운도 따랐다. 성공은 기회와 실력의 합작품이다. 어느 하나만 있으면 안 된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회가 빨리 왔다. 2012년 1군에 데뷔해 7경기에 나간 한동민은 2013년 99경기에 출전해 14개의 홈런을 쳤다. 남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을 때, 당시 사령탑이었던 이만수 감독이 한동민을 전격 발탁했다. 현역 시절 홈런왕이었던 이 감독은 “거포로 성장할 수 있는 선수”라며 한동민을 밀고 나갔다. 한동민조차 “생각보다 1군에 빨리 왔다. 사실 그때 실력에 비해 금방 올라왔던 것 같다”고 했다.
1군 경력이 있어 국군체육부대(상무)에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군 복무를 해결하면서 야구도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지명 당시까지만 해도 생각하기 어려웠던 방향으로 야구가 술술 풀렸다. 그 뒤로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한동민은 상무에서 퓨처스리그(2군)를 폭격한 뒤 팀에 복귀해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이제 한동민이 없는 SK 타선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 연습경기가 한동민은 물론 SK의 미래까지 바꿔놓은 셈이다.
호타준족 유망주, 30홈런 거포로 성장하다
재밌는 것은 SK의 당시 그 긍정적인 리포트에서조차 “30홈런 이상을 칠 수 있는 타자로 성장할 수 있다”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리포트에는 “호타준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예상치 못한 한 번의 연습경기로 전기를 마련한 한동민은, 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한동민은 “스스로도 대학 시절까지 내가 힘이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발은 빠른 편도 아니지만, 그래도 느린 편은 아니었다. 대학이라 그린라이트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뛰어서 제법 도루도 많이 했다”고 그 리포트가 적힌 배경을 추측했다. 지금의 힘은 웨이트트레이닝의 효과를 일찍 터득한 열매다. 그것도 어떠한 한 우연한 과정에서 출발했다. 어깨 부상이었다.
“졸업반 때 오른쪽 어깨가 조금 좋지 않아 재활에만 매진하던 시기가 있었다. 웨이트트레이닝을 그때 알아 열심히 했다. 그런데 할수록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 효과를 알게 되고 더 열심히 웨이트를 했던 것 같다. 그 이후 치면 공이 조금 멀리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동료들이 무겁다고 말하는 방망이도 나한테는 가장 가벼운 느낌이었다”

꾸준한 웨이트트레이닝은 호타준족 가능성만 가지고 있었던 이 미지명선수를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로 성장케 했다. 지금이야 담담하게 말하지만 피나는 노력이 숨겨져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으로 상무에서의 2년은 내면을 살찌우는 시기가 됐다. 한동민은 “정신적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 운동만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고, 여가 생활도 야구를 보는 것 외에는 없었다. 간절함이 있었다. 나가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었다”고 했다.
여러모로 장점이 많은 선수다. 힘도 좋고, 홈런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본적인 발사각도 좋다. 다른 타자들이 대개 어려워하는 낮은 쪽 코스를 잡아당기는 능력은 리그 최고다.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완성형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돌려 말하면, 한동민의 잠재력은 아직 다 터지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정경배 SK 타격코치는 "한동민이 스윙을 한 이후 자기 배트 스피드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 거리는 경우를 많이 봤을 것이다. 그만큼 스윙 스피드가 좋고,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췄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100타점 한동민, 19세 한동민에게
그런 한동민은 19일 수원 KT전에서 대포 두 방을 터뜨리며 SK 역사를 새로 썼다. 이미 SK 좌타 역사상 첫 30홈런을 친 선수로 기록된 한동민은 이날 1회 솔로홈런으로 100타점까지 채웠다. 박정권이 2014년 109타점을 기록한 적은 있지만, 30홈런-100타점을 동시 달성한 좌타자는 SK 역사상 한동민이 최초다.
지난해 발목 수술 후 올 시즌 초반 상태가 완벽하지 않아 다소간 부침은 있었다. 시즌 타율은 2할8푼으로 지난해(.294)보다는 조금 떨어졌다. 그럼에도 지난해 성적(29홈런-73타점)을 벌써 뛰어넘었다. 홈런은 리그 5위, 타점은 리그 8위, 출루율과 장타율의 합인 OPS도 0.950으로 리그 14위다. 전반기에 타율이 다소 떨어졌지만 후반기에는 타율 3할1푼2리를 기록하면서 정상 페이스를 찾았다. 내년에 더 큰 기대를 걸어봐도 될 흐름이다.
한동민은 30홈런-100타점에 대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한동민은 “19세 때는 물론 지명을 받을 때도 절대 생각하지 못했던 기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패한 타자가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이었을까. 한동민은 “19세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동안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답을 내놨다.
“그때(미지명 당시)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나고나니 인생은 주춤할 뿐이지, 열심히 하다보면 결국 안 되는 것은 없더라. 19세의 한동민은 많은 생각을 하기보다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소중한 깨달음을 얻는 데까지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10년에 걸쳐 터득한 이 중요한 교훈은 한동민의 남은 10년 현역 인생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것이다. SK 담당기자 /skullbo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