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위해 직업을 버렸다. KBO 리그뿐만 아니라 세상사에서 보기 쉬운 일은 아니지만, 트레이 힐만 SK 감독의 철학은 확고했다.
트레이 힐만 감독은 13일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LG와의 경기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자청해 올 시즌을 끝으로 SK를 떠난다고 직접 발표했다. SK는 지난 아시안게임 휴식기 중 힐만 감독에게 재계약 제안을 했으나 힐만 감독은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양친의 병환 때문이었다.
힐만 감독은 민감할 수 있는 개인사를 솔직하게 밝혔다. 새 어머니가 알츠하이머에 시달리고 있고, 유일하게 곁에 있을 수 있는 아버지마저 85세의 고령이다 보니 거동이 불편하다고 했다. 모친도 모친이지만, 몸이 불편한 와중에 중증 환자를 돌보는 부친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양친에 어떤 일이 생겨도 힐만 감독은 당장 달려갈 수 없는 위치다. 이에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능력이 있는 감독이지만, 아직 새 직장이 결정된 것은 없다. 힐만 감독도 기자회견 중 이를 누차 강조했다. 시장 현황에 밝은 한 관계자는 “힐만 감독의 인맥이 넓어 텍사스주 근처에서 야구 관련 직업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MLB에서도 감독까지는 어렵지만, 벤치코치로는 충분히 부름을 받을 만하다”고 점쳤지만, 당장은 ‘백수’ 생활을 해야 한다.
감독은 부도 따르지만, 그 이상의 명예직이다. 미국의 수많은 지도자 중 MLB 팀 감독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30명이다. KBO 리그도 오직 10명에게는 주어지는 사명이다. 그만큼 특별한 직업이다. 오랜 기간 감독 생활을 한 힐만 감독은 그런 포기하기 싫은 명예까지 버렸다. 모두 가족을 위해 내린 결단이다.
KBO 리그에 주는 여운도 잔잔하다. 반대편 덕아웃에서 이 소식을 들은 류중일 LG 감독은 “우리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며 생각에 잠겼다. KBO 리그 관계자들은 가족보다는 야구가 우선이다. “개인보다는 조직을 위해”라는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박혔다. 팀 스포츠에서 일견 맞는 부분도 있지만, 지나치게 개인의 삶을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선수뿐만 아니라 구단 관계자들까지 다 그렇다.
때문에 정말 중요한 출산이나 임종을 못 보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가족이 아파도 거의 99%는 경기장에 나온다. 그렇게 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고된 훈련을 마다하며 돈을 버는데,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중요한 시기에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힐만 감독은 항상 “첫째가 주님, 둘째가 가족, 셋째가 직업”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런 신념을 지켰다. 연 100만 달러에 가까운 금전적인 대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프로야구단 감독직을 가족을 위해 버렸다. 세상에서 무엇이 더 소중한가. 힐만 감독은 KBO 리그에 한 가지 중요한 물음을 남기고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skullbo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