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신성일(강신성일)이 타계했다. 그가 이루지 못한 마지막 꿈을 품에 안은 채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열정적이었던 고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안긴 바다.
폐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신성일은 오늘(4일) 오전 2시 30분 숨을 거뒀다. 향년 81세.
앞서 지난 3일 오후 고인이 위독한 상태로 응급실에 입원해 있고 유족이 한 차례 빈소를 예약하고 취소하는 바람에 한 차례 사망 오보가 흘러나와 보는 이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지난 2016년 6월 폐암 3기 진단을 받고 투병해온 신성일은 강한 건강 회복 의지를 보이며 활발한 활동을 보여왔다. 무엇보다 최근까지도 공식석상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왔던 터라 그의 위독한 상태와 사망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다.

고인은 지난 달 4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진행된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신선한 의상과 환한 미소로 팬들의 환호를 받았으며 관객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측근은 "투병 중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활기차고 열정적인 모습이었다"라고 그의 공식석상 마지막 모습을 회상했다.
실제로 고인의 투병 의지는 대단했다. 그는 지난 해 OSEN과의 인터뷰에서 "난 투병 환자가 아닌, 치료받는 사람"이라고 밝히며 "암세포를 축소시키고 수술을 할 예정이다. 내가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그 만큼 중요하다. 의사 선생님이 다른 기관은 다 튼튼하다고 하더라. 앞으로 잘 치료받겠다"라고 긍정적인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고인은 '완쾌 후 계획'을 세워놓기도 했다. 그는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취재진에 '행복’이라는 작품을 기획임을 밝히며 "요새 드라마들은 막장 드라마가 너무 많고 영화에도 잔인하고 살벌한 내용이 너무 많다. 또한 여자주인공인 영화가 없다. 그래서 따뜻함이 없다. 그래서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다시 쓰고 있다. 내년 봄에 촬영 들어가려고 한다"라고 전했다.
또 "두 번째 작품은 김홍신의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 저작권까지 다 받았다. 이렇게 2년 간의 계획이 다 세워져 있다"라고 덧붙이며 영화 제작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한편 고인은 한국영화사상 가장 오랫동안 톱스타의 지위를 누린 배우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관통하는 인기배우이자 한국영화사에 있어 마치 신화 속 인물처럼 특별한 존재다.
1960년 23세 때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후 2013년 '야관문: 욕망의 꽃'(임경수)까지 모두 513편이라는 어마어마한 편수의 작품에 출연한 그는 60-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였다. '맨발의 청춘', '청춘 극장',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등의 다수의 히트작을 냈다. 특히 1966년 한 해에만 모두 89편의 작품에 출연했고 한국영화 1세대, 2세대 트로이카 여성 배우 모두와 호흡을 맞추며 명실상부 당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남성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그러다가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에서 중후한 중년의 얼굴을 만들어갔다. 또한 그는 멜로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사극, 액션, 사회물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배우로서의 외연을 확장했다.
1964년 11월, 서울 워커힐에서 전 국민의 관심 속에 배우 엄앵란과 결혼식을 올렸다. 1979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연애교실', '어느 사랑의 이야기', '그건 너' 등을 연출했고, 1983년에는 성일씨네마트를 설립해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90년대 후반 정치 쪽으로 눈을 돌려 은막에서의 예명인 '신성일'에 원래 성인 강을 붙여 '강신성일'로 활동하기 시작, 2000년 제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에도 영화와 관련된 일을 놓지않고 2002년에는 춘사 나운규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nyc@osen.co.kr
[사진] OSEN DB, 한국영상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