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V4 스토리]③‘운명적 만남’ 힐만-염경엽 하모니, 혁신이 만든 정상 정복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8.11.21 18: 02

SK 와이번스가 2018 한국시리즈에서 업셋 우승을 했다. 2010년 이후 8년 만에 거둔 네 번째 우승이다. SK왕조의 역사가 희미해지는 순간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은 KBO리그 최강은 아니다. 이번 우승은 새로운 왕조를 향한 첫걸음이다. 몇 회에 걸쳐 V4의 장정을 짚어본다. 
SK는 2016년 가을, 처절한 추락을 경험하고 있었다. 일단 포스트시즌에는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봤지만, 팀이 막판 연패에 빠지며 결국 5위 쟁탈전에서 밀려났다. 김용희 당시 감독과의 재계약 불가는 그 시점에서 결정이 됐다. 이제는 새 판을 짜야 할 시기였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대업을 세운 SK였다. 그러나 2013년부터 성적이 추락하고 있었다. 중위권 수성도 아슬아슬했다. 포스트시즌 진출은 2015년 와일드카드 결정전 출전이 전부였다. 팀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내부에서 갑론을박이 일었고, 새 감독 선임이 가장 중요한 과제임은 이견이 없었다.

내부 승격도 고려를 했다. 당시 코칭스태프를 이루고 있던 세 명의 후보자가 차례로 구단 고위층과 면접을 봤다. 그 시점, 민경삼 당시 단장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외국인 감독 후보자들과 면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세 명의 후보가 민 단장의 ‘면담 약속 명단’에 올라 있었다. 당초에는 투 트랙으로 시작된 감독 선임 작업이었으나 갈수록 외국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트레이 힐만 감독이 있었다.
힐만 감독은 SK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인사였다. 직접적인 인연은 아니었지만, 간접적으로 그랬다. SK는 일본프로야구 니혼햄과 적지 않은 교류를 주고받은 기억이 있다. 당시 니혼햄 관계자들로부터 힐만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SK의 영입 후보군에 올라간 것도 니혼햄에서의 성공적인 감독 생활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휴스턴의 벤치 코치로, 현역 MLB 코치였던 힐만 감독은 한국행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당시 힐만 감독의 자택에서 직접 면담을 했던 민 단장도 힐만 감독의 선수단 운영 철학에 높은 점수를 내렸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던 SK의 상황에 딱 맞는 지도자라는 생각을 했다. 힐만 감독도 몇년만 더 MLB 코치로 일하면 막대한 연금을 확보하는 상황이었지만, 그에 대한 미련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원했다. 그렇게 양자가 손을 잡았다.
외국인 감독이 팀에 들어오면서 자연히 내부 변화가 불가피했다. 한 관계자는 “뼈를 깎는 심정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오랜 기간 팀을 지켰던 프랜차이즈 코치들이 한꺼번에 팀을 떠났다. 리더십의 지각변동이 불가피했다. 한 선수는 “정들었던 코치님들이 싹 바뀌는 것을 보고 ‘구단이 진짜 새 판을 짜기 시작했구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면서 “힐만 감독님은 우리를 하나도 몰랐다. 알게 모르게 새 감독의 눈에 들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여기까지는 일상적으로 새 감독이 올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SK는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넥센 감독직을 내려놓고 충전의 시간을 보내려 했었던 염경엽 감독을 단장으로 영입한 것이다. 당초 염 단장은 1년은 미국에서 공부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SK의 설득에 끝내 마음을 돌렸다. 프로 선수 출신으로 구단 프런트(현대·LG), 코치·감독(넥센)을 모두 경험했던 염 단장의 최종적인 꿈은 단장으로서의 성공이었다. 지나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스타 감독과 스타 단장의 만남이었다. 물론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적으로 “외국인 감독은 미국식에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프런트와의 관계 설정이 원만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힐만 감독은 한국보다 감독이 더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일본에서 오랜 기간 감독 생활을 했다. 때문에 “다른 외국인 감독과는 다를 것이다. 마냥 프런트가 그려주는 큰 그림에 따라가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다만 2년간 큰 잡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염 단장이 자세를 낮췄다. 1군 운영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은 2군 매뉴얼을 중심으로 팀을 개혁해 나갔다. 프런트 시절부터 선진 야구 공부를 많이 한 염 단장은 한 달에 한 번씩 강화에서 집중 토론 시간을 열고 선진화된 매뉴얼을 이식시키려 애썼다. 힐만 감독이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선수들을 만들고 준비시키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믿었다.
힐만 감독 또한 프런트의 임무를 존중했다. 팀의 전체적인 큰 방향성에 공감한 힐만 감독 또한 프런트 영역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것을 물어보며 한국 야구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힐만 감독은 “염 단장은 이미 한국에서 성공한 감독 출신이다. 그런 경험을 듣는 것이 도움이 됐다”고 고마움을 표현한다. 다만 자신의 철학을 버리지는 않았다.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중심을 잘 잡고 2년간 팀을 이끌었다.
사실 난상 토론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몇 사안에 있어서는 구단의 의견과 힐만 감독의 생각이 달랐던 적도 있다. 어느 때는 힐만 감독의 의견이 관철된 경우도 있었고, 어느 때는 프런트의 의견이 더 반영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감정 싸움보다는 어떠한 것이 합리적이냐에 대해 포커스를 놓고 토론이 이뤄졌다. 그래서 뒤끝이 없었다. 이에 대해 힐만 감독과 염 단장은 “가고자 하는 방향성이 서로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염 단장은 과감한 트레이드로 힐만 감독이 활용할 수 있는 전력을 만들었고, 힐만 감독은 불평불만 없이 그 전력을 토대로 합리적인 운영을 해내갔다. 그 결과 특별한 혹사 없이도 정규시즌 2위를 차지했고, 그 아껴놓은 힘을 바탕으로 끝내 거함인 두산을 물리치고 한국시리즈 정상을 밟았다. 어느 한 쪽이라도 없었으면 불가능한 성과였다. 힐만 감독과 염경엽 단장의 관계와 하모니, 그리고 2년간의 과정은 이제 적절한 현장·프런트의 균형을 꿈꾸는 타 팀의 좋은 교본이 됐다.
힐만 감독이 개인적인 사정을 이유로 팀을 떠나면서, 이제 그 자리는 염경엽 감독이 메운다. 두 지도자는 이·취임식에서 뜨거운 포옹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힐만 감독은 자신을 2년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구단 관계자들에 고마워하며 한국을 떠났다. 염경엽 감독은 힐만 감독이 만들어놓은 좋은 문화와 방향성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각오로 새 시즌을 준비한다. 2016년 가을 뼈를 깎는 혁신의 결과는, 이제 한국시리즈 우승을 넘어 장기적 롱런의 토대로 달려가고 있다. /skullbo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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