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전현무, 문근영, 설민석, 유병재, 다니엘, 최희서가 일본의 중심에서 가슴 아픈 역사를 공부했다.
9일 전파를 탄 MBC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에서 전현무, 문근영, 유병재, 다니엘, 설민석은 일제강점기 전후의 아픈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 도쿄로 떠났다. 2019년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림 100주년이 되는 해다.
문근영은 차에 타자마자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물었다. 설민석은 “1894년 청일전쟁이 벌어졌는데 일본이 이겨서 조선을 차지했다. 대만, 요동 반도도 가져갔는데 일본의 세력에 놀란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서 삼국 간섭이 시작됐다. 일본으로선 러시아와 친한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비참하게 희생된 여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아이러니하게 일본에서 볼 수 있다”고 밝혀 안타까움을 더했다. 설민석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됐다. 그런데 1905년 불평등조약이 체결돼 고종이 이를 무효화 하려고 1907년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친일파 송병준과 이완용은 고종한테 일왕에게 가서 무릎 꿇고 사과하거나 자살하라고 했다. 고종은 ‘경들은 도대체 누구의 신하입니까’라고 역정을 냈다”고 당시 이야기를 들려줬다.
결국 강제퇴의 된 고종. 이후엔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인 순종이 황위에 올랐는데 아들이 없어 형제들 가운데 세제 책봉을 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 영친왕이었다. 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의 손 아래에서 일본에서 자라며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인 여자와 결혼까지 했다. 광복 후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게 귀국을 거부 당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때에서나 고국으로 돌아온 비운의 인물. 설민석은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영친왕이 1963년 귀국했지만 실어증에 걸린 상태였다. 말 한 마디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알렸다.

대한제국 황실의 가족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설민석은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옆에 1930년 영친왕의 일본 거주를 위해 서양식으로 설계된 저택이 있다. 독립신문은 당시 ‘영친왕은 아비도 없고 나라도 없는 짐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독립군의 눈에는 영친왕이 일본에서 호위호식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지금 영친왕의 저택은 카페나 연회장소로 쓰인다”고 말했다. 문근영은 제대로 된 설명 없이 레스토랑으로 변한 영친왕의 저택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황태손 이구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문근영은 “2005년 프린스 호텔 화장실에서 황태손 이구가 숨진 채 발견됐다”고 지식을 뽐냈다. 설민석은 “고종이 60살에 낳은 딸인 덕혜옹주의 삶도 비참했다. 조현병에 걸린 채 귀국한 그는 ‘작선재에서 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라는 마지막 글을 남겼다. 딸이 사망한 지 9일 만에 이방자 여사도 별세했다. 모두가 비참하게 끝을 맺은 대한제국 황실”이라고 설명해 듣는 이들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도쿄에서 이들은 두 팀으로 나눠져 의거로드에 나섰다. 전현무와 다니엘은 새로운 친구를 만났는데 영화 ‘박열’의 여주인공 최희서였다. 그는 “‘박열’이 일본에서 개봉하게 됐다”고 밝혀 전현무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작품으로 국내 영화제 상을 휩쓸었던 최희서는 유창한 일본어로 현지 매체와 인터뷰까지 진행해 시선을 모았다.
설민석, 문근영, 유병재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 독립선언 근거지와 이봉창 의사의 의거지를 찾았다. 설민석은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원봉 선생에 대해 알려줬다. 문근영은 “빈 라덴 이전까지 가장 많은 현상금이 걸렸던 인물”이라고 부연했고 유병재와 설민석은 “제일 잘생겼다”고 치켜세웠다.
이와 함께 이봉창 의사에 관해 설민석은 “그 분은 조선말보다 일본말을 더 잘 썼다. 신 일본인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모순 속에 결국 조선인으로 살기로 했다. 김구 선생 앞에서 ‘31년간 쾌락을 맛봤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영원한 쾌락을 위해 성업을 완수하겠다’고 말한 뒤 폭탄을 일왕에게 던졌다. 거사는 불발됐지만 독립정신을 지키기 위해 숭고하게 희생했다”고 밝혔다.
전현무, 최희서, 다니엘은 박열과 후미코 등 수많은 독립 투사들이 옥중 수감된 이치가야 형무소 터로 향했다. 하지만 형무소는 온데간데 없이 공원 놀이터로 변해 있었다. 일본 변호사 연합회에서 세운 위령비만 있을 뿐. 세 사람은 크게 실망했다. 최희서는 “박열과 후미코를 변호했던 후세 다츠지 변호사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위령비는 분리수거 터에 방치돼 있었다. 세 사람은 묵념하며 희생된 선조들의 넋을 위로했다.
이어 전현무, 다니엘, 최희서는 관동대학살 터로 이동했다. 학살의 참상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철교 아래 공터였다. 이곳에도 추도비가 있었는데 비석 주위를 지키는 한국적인 소품이 놓여져 있어 뭉클함을 더했다. 전현무는 “일본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고 세운 비석이다. 봉선화 단체인데 반대 세력이 훼손할까 봐 사유지에 추도비를 건립했다”고 밝혔다. 최희서는 비문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추모비를 건립하고 유지 관리 중인 일본인이 등장했다. 그는 “멀리서 와주셔서 감사하다. 대학생 때 관동대학살에 충격 받아 증언과 증거를 모았다. 조선인 학살은 처참한 살해사건이고 두 번 다시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일제강점기 대한 민족의 노래 ‘봉선화’에서 단체 이름을 따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방문자는 강 건너 주민이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조선인 5~6명을 때려죽였다더라. 가해자의 손자인데 추모비를 세울 때 동참했다. 근처 주민들의 참여가 가장 의미 있다. 1년간 설득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니 모두 허락해줬고 같이 이 곳을 지키고 있다”고 알렸다. 전현무는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다.
/comet568@osen.co.kr
[사진] 선을 넘는 녀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