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만 '엑시트' 이상근 감독 "소심한 백수 용남, 내 모습이기도 해" [Oh!커피 한 잔]
OSEN 하수정 기자
발행 2019.09.05 07: 01

개봉 전만 해도 '엑시트'의 900만 흥행을 예상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올여름 극장가 최고의 흥행작은 자타공인 '엑시트'다. 
영화 '엑시트'(감독 이상근, 제작 (주)외유내강, 공동제작 필름케이, 제공배급 CJ엔터테인먼트)는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심을 탈출하는 청년백수 용남(조정석 분)과 대학동아리 후배 의주(임윤아 분)의 기상천외한 용기와 기지를 그린 재난탈출액션 작품이다. 기존 한국의 재난물이 반복하는 뻔한 공식에서 벗어나 오직 탈출에 집중하는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담아냈다. 이 과정에서 빛나는 아이디어와 번뜩이는 재치가 돋보인다.  
지난 7월 31일 개봉한 '엑시트'는 경쟁작들에 비해 압도적인 화제성이나 톱스타 캐스팅은 아니었지만,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 3일째 100만, 4일째 200만, 6일째 300만, 8일째 400만, 11일째 500만, 14일째 600만, 18일째 700만 , 25일째 800만을 돌파했다. 순 제작비는 약 102억 원으로, 홍보비 등을 더한 총 제작비는 약 130억 원이다. 개봉 7일 만에 일찌감치 손익분기점인 350만 명을 넘어섰다.

9월에 접어들어서도 꾸준히 관객을 동원한 '엑시트'는 4일 오후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누적관객수 900만 79명을 기록했다. 장기 흥행에 힘입어 36일 만에 드디어 900만 고지를 밟았다. 연출을 맡은 이상근 감독은 일명 '9시트'라고 불리며 숫자 9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닌 '엑시트'의 900만 돌파를 기념해 칠판을 숫자 9로 가득 채운 인증샷을 남겼다. 
상업영화 데뷔작으로 흥행과 호평,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상근 감독은 삼수 끝에 성균관대학교 영상학과를 입학했고, 재학시절 단편영화 등을 만들면서 감독의 꿈을 키웠다. 한예종 대학원에 들어간 뒤, 2006년 제5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 '베이베를 원하세요?'를 출품했다가 희극지왕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은 류승완 감독이었고, 이를 계기로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연출부 생활도 했다. 2008년에는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가 학업을 마무리하고, 시나리오 작업도 했다. 이때 탄생한 시나리오가 '엑시트'이고, 7년 동안 꼼꼼히 구상한 결과, 마흔 살이 넘어서야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상근 감독은 "혼자 글 쓰겠다고 카페를 전전 했는데, 딱 9년 뒤에 영화가 나왔다"며 "그 기분은 수학여행에서 관심을 못 받는 조용한 아이가 갑자기 무대 위에서 3단 고음을 한 기분이다. 집에서 하던 노래 연습의 결과가 무대에서 나와 친구들의 박수를 받는 기분이랄까. 아마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며 감격적이라고 했다. 
'엑시트'는 택시에서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 덕분에 나온 영화다. "유독가스 얘기가 나왔는데, 기체마다 무게가 달라서 낮게 깔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 흰색의 유독가스가 10m 이상 깔리면 재난 형식으로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인공들이 안갯속에서 살 궁리를 하면서, 뭔가 뛰어다니고, 돌파구를 찾는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며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를 공개했다. 
악역, 무능력한 정부, 신파 등 재난영화 공식을 탈피한 것에 대해 "처음부터 대단히 새로운 재난영화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다만, 신선한 상황을 만들고 싶었다. 과잉으로 비틀기보단 나노로 미세하게 인물에게 접근하고 싶었다. 사회 현상이 되면 정부가 나오고, 악역이 등장하면 희생이 발생한다. 그럼 사람이 나쁘게 변하는 등 공식들을 반복하기 싫었다. 그런 부분에서 주는 순기능과 재미도 있겠지만, '탈출에 집중하자, 과감하게 돌파하자'고 판단했다"며 그 이유를 답했다. 
주인공 백수 용남은 '취업 실패의 아이콘'이다. 할 줄 아는 건 이력서에도 쓰기 민망한 클라이밍이 전부다. 그마저도 미국 뉴욕의 빌딩 숲을 최첨단 슈트로 활강하는 스파이더맨과 비교하면 볼품없다. 용남은 위기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외벽을 오르는데, 분필가루와 밧줄, 그리고 투박한 맨손이 전부다. 그야말로 '짠내나는 현실 스파이더맨'이다.
이상근 감독은 "스파이더맨은 특수 능력이고, 용남은 평범한 사람의 클라이밍 재주일 뿐이다. 국가대표 기술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간다. 능숙하게 올라가는 것처럼 찍지 않으려고 했다. 최대한 과잉을 피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필살기 하나쯤은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정받지 못하거나 작은 능력처럼 보일지라도 그런 능력이 적재적소에 발휘되는 순간이 온다면 재밌지 않을까?"라며 첫 구상을 했다는 이상근 감독. 그는 "용남의 모습에 내가 많이 투영돼 있다. 체력 부분은 좀 다르지만, 집안에서의 위치, 어른들 앞에서 쭈뼛대는 '쭈구리' 같은 모습 등 그런 에피소드는 실생활에서 느낀 것들이 많이 반영됐다"고 밝혔다. 
이어 "사실 난 용남의 모습에서 이미 한계치를 넘었다. 어느 정도 레벨이 올라가면 질문도 거의 안 하신다. 용남이 참석한 고희연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장손이라서 '네가 먼저 결혼해야 동생들도 하지, 도대체 언제 가니?'라는 말씀을 하시더라. 용남의 에피소드는 내가 겪은 상황이기도 하다. 난 소심해서 항변, 항의를 못 하고 마음 속에 간직하는 편인데, 용남은 다르다. 내가 못한 것을 용남이가 하도록 설정했다"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또한, 이상근 감독은 '엑시트'가 개봉하기 전까지 집안 어른들에게 "도대체 영화는 언제 나오니?"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그는 "아직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캥거루다. 2015년쯤 제작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이제 뭔가 하겠구나' 생각하신 것 같다. 그런데 2~3년이 지나도 개봉을 안 하니까, 친척분들이 '넌 뭐하니?', '그러면 안 된다', '형님, 말려야 된다', '정신 차리게 해야 된다' 등 얘기가 많았다. 그것도 어느 순간이 지나니까 안 물어보셨다. 다 애정이 있어서 걱정하신 것 같다"며 웃었다. 
첫 영화부터 '900만 흥행' 타이틀을 거머쥔 이상근 감독은 "조정석, 임윤아 배우를 캐스팅 한 건 정말 복이다. 지난 9년의 세월을 보상받은 기분이다. 두 배우의 앙상블도 잘 맞았고, 운이 좋았던 것 같다"며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감독이 되고 싶다. 영화감독의 삶을 지속할 수 있길 바란다"며 감독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소망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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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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