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영화 따라하기 싫어"..정일성 감독 밝힌 #영화원칙 #평생138편 #원동력(종합)[24th BIFF]
OSEN 김보라 기자
발행 2019.10.04 11: 43

 “젊었을 때는 ‘나도 평생 영화를 할 수 있을까?’ 싶었죠(웃음).”
정일성(91) 촬영감독이 4일 오전 부산 우동 신세계백화점 9층 문화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영화 인생을 회고하며 “제가 영화를 시작해서 한 10년쯤 됐을 때 (회고전을 연 외국감독을 보며) ‘어쩌면 저렇게 평생 동안 영화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라며 이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저를 계기로 많은 촬영감독(후배들)의 회고전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나이로 올해 91살인 그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찌 보면 젊은 감독들보다 훨씬 더 영화를 향한 애정 어린 에너지가 넘쳐 흘렀다.

4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 정일성 촬영감독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umi@osen.co.kr

기자회견에 앞서 정 감독은 “부산영화제 날짜를 잡아 놓고, 부산 경북 강원도 지역이 태풍의 피해를 많이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거다. 시민들이 빨리 극복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영화제도 중요하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루빨리 정상적 삶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안부 인사를 건넸다.
정일성 감독은 “제 영화 인생을 보면 제가 일제시대에서 태어나 해방이 됐고, 이후 무정부 시대를 거쳐 좌익과 우익이 팽배해졌다. 남북 분단은 물론 4·19 민주화 운동, 5·16 군사정변 거친 게 제 영화일에 도움이 됐다. 영화를 통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지에 대해 고민해봤다”며 “지금까지 제가 일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불행했던 근현대사를 통해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나누었던 우리 세대를 통해 영화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인생을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 일제 해방에서 6·25까지, 자신이 영화일을 시작한 1955년부터 현재까지 크게 세 등분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는 “아시다시피 일제시대 핍박받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명작이 탄생했다. 또한 전체주의 시대에 영화를 통해 항거를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아리랑'이 탄생했다는 것은 후배들에게 정신 무장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4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 정일성 촬영감독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umi@osen.co.kr
그러면서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을 겪었을 때까지 한국영화계는 처참했다. 우선 경제 상황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토양이 되지 않았음에도 선배들이 그나마 맥을 유지하며 한 편씩 영화가 나왔다. 명작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정신적인 에너지를 주었다. 선배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6·25이후 지금까지 보면 영화적 진화가 진행됐다. 무성에서 유성, 흑백에서 컬러로 진화됐다”고 밝혔다.
정일성 감독은 “당시 필름의 완성도가 떨어진 상태에서 영화의 역사가 이어져왔다”며 “그러나 현재 영화인들을 보면, 기술을 통해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그렇다면 영화의 질이 한층 나아져야 하는데, 물론 그 중에 영화의 질이 나아진 것도 있지만, 우리들이 겪은 정신의 질을 이어받아 더 나은 영화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 세대로서 보면 현재 영화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부탁하고 싶다”고 당부했다.
그는 영화 ‘가거라 슬픔이여’(1957)를 시작으로 ‘화녀’(1971),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1973), ‘호기심’(1974), ‘바보들의 행진’(1975), ‘여고 얄개’(1977), ‘별들의 고향2’(1978), ‘사랑의 조건’(1979), ‘만다라’(1981), ‘만추’(1982), ‘반금련’(1982), ‘저녁에 우는 새’(1982), ‘삐에로와 국화’(1982), ‘불의 딸’(1983), ‘아다다’(1987), ‘밀월’(1989), ‘장군의 아들’(1990) ‘젊은 날의 초상’(1991), ‘장군의 아들3’(1992), ‘서편제’(1993), ‘본 투 킬’(1996) ‘아버지’(1997) ‘춘향뎐’(2000) ‘취화선’(2002) ‘하류인생’(2004) ‘천년학’(2007) 등의 작품을 촬영했다. 말 그대로 한국영화 100주년사에 산증인이다.
정일성 감독은 “제가 지금까지 138편 정도를 찍었는데, 그 중에서 40~50편은 굉장히 부끄럽다. ‘대표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시는데, 젊을 때는 내가 촬영해 수상한 영화들을 대표작이라고 답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딱서니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40편~50편의 영화가 교과서처럼 나를 지배하고 있다. 실패한 영화가 나에게는 좋은 교과서 같다는 생각을 한다”며 “과거를 유추해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4·19와 5·16 이후다. 당시 침체기였는데, 그 시기에 나온 영화를 보면 역사적으로 남는 영화가 나왔다는 것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제가 찍었든, 안 찍었든. 신상옥이 만든 일련의 작품들이 대단하다”고 극찬했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영화 100주년 되는 해에,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기생충’)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일에 개인적으로 축하를 드린다”고 진심을 담아 목소리를 높였다.
4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 정일성 촬영감독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자회견을 하며 무대 앞으로 걸어나와 질문을 받고 있다. /rumi@osen.co.kr
하지만 “후배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이외에 좋은 감독, 좋은 촬영감독들이 많다. 내가 이름을 말하면 말하지 않은 감독들에게 왕따를 당할 거 같다”고 전해 웃음을 전했다.
후배들에게는 필름 촬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저는 아날로그 시대 감독이다. 요즘엔 디지털로 촬영을 한다. 필름촬영을 했던 사람들이 골동품 취급을 당한다”며 “디지털 촬ㅇㅇ을 하더라도 아날로그적 과정을 완벽하게 이수하지 않으면 좋은 디지털 영화를 완성할 수 없다. 필름 촬영을 건너뛴 사람들을 보면 뭔가 부족해 보인다. 촬영감독은 기술적인 부분을 감독에게 제공해서 완성된 것을 (감독에게)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창의적이고 독창적이게 촬영을 할 수 있다. 지금부터 필름촬영을 공부해도 늦지 않았다. 저는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고 독학을 통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대기업 중심의 대작 영화에 극장이 집중하고 있는 현실도 꼬집었다. “대기업들이 흥행할 영화에는 돈을 퍼부으면서 독립영화에는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이태리 베니스를 보면 좋은 작가들을 키워서 영화의 부흥을 일으켰다. 우리도 독립영화 작가들에게 투자할 기업이 나와서 대형 영화에 대적할 만한, 토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라며 “예나 지금이나 저예산 작가들은 각오를 해야 한다. 큰 극장으로부터 당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신을 무장하고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미래는 밝다”고 역설했다.
4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 정일성 촬영감독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umi@osen.co.kr
그는 ‘남들보다 오래 일한 비결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저는 원칙주의자다. 내 나름대로 생각한 원칙이 있다. 형식, 리얼리즘, 모더니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화의 격조는 감독이 만드는 게 아니라 촬영감독이 만드는 거다”라며 “촬영감독의 역할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리얼리즘 속에서 꿈이 없으면 한낱 뉴스나 기록물로 전락한다. 촬영감독 나름의 꿈이 있어야 한다. 제 나름의 원칙을 한 번도 저버린 일 없이 지금까지 이어왔다”고 답했다.
그는 ‘앞으로의 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걸 어떻게 다 이루겠나. 하고 싶은 걸 다하는 건 개인적인 욕심이라고 생각한다”며 “그간 저는 38명의 감독과 작업을 했다. 많게는 20여편의 작업을 한 감독이 있는가 하면, 1편만 하고 관계를 끝낸 감독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감독들의 힘이었다. 제가 일생을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1/3은 감독, 1/3은 아내, 1/3은 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꿈이 있다면 제가 했던 작품들 중에 정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답했다.
“한국영화에 관객들이 많이 드는 건 좋은 일이다. 근데 저는 미국영화의 아류작 같은, 흉내내는 영화를 찍고 싶지 않다. 저는 남의 영화를 일절 안 본다. 그러면 제가 감동받는 부분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모방하게 된다. 봤으면 나도 모르게 휩쓸려 따라할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저는 미국영화를 따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내게 앞으로 촬영 의뢰가 들어오지 않을 텐데 저는 작은 영화를 하고 싶다. 폄하하는 의미에서 요즘 한국영화를 얘기한 게 아니라 제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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