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못 속인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아들도 질주 본능을 멈추지 못했다. 대를 이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아들이 아버지의 플레이를 떠올리게 했다.
6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9 WBSC 프리미어12 예선 C조 첫 경기 한국-호주전. 3회말 무사 1루에서 이정후(21·키움)가 우측 라인 쪽으로 날카로운 타구를 날렸다. 전력 질주한 이정후는 2루까지 무난하게 들어갔다.
중계 플레이 과정에서 호주 1루수 루크 휴즈가 공을 한 번 놓치자 이정후는 멈추지 않고 3루까지 노렸다. 이정후가 런다운에 걸린 사이 3루에 도달한 1루 주자 김하성이 홈으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했다. 이정후는 주루사를 당했지만 한국은 추가점을 냈다.

이 장면은 13년 전 그의 아버지 이종범(49) LG 2군 총괄코치를 떠올리게 했다. 지난 2006년 3월16일(한국시간) 미국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에서 열린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리그 1조 한국-일본전. 이종범은 8회초 1사 2,3루에서 좌중간을 가르는 총알 같은 2루타를 터뜨렸다. 주자 2명 모두 여유 있게 홈을 밟았다.
내친김에 3루까지 노리던 이종범은 일본의 중계 플레이에 걸려 아웃됐다. 하지만 0의 균형을 깨는 2타점 결승타로 일본전 승리의 주역이 됐다. 주루사 후에도 두 팔을 번쩍 들며 만세를 부른 이종범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자랑스럽다”는 말로 가슴을 울렸다.

그로부터 13년의 시간이 흘렀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아들 이정후가 공교롭게도 3루타를 노리다 아웃됐다. 주루사를 당했지만 날카로운 타격과 과감한 주루 플레이로 득점의 발판을 마련했다. 상대팀이나 경기 상황이 13년 전처럼 극적이진 않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질주 본능은 국제대회에서도 ‘부전자전’ 그 자체였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관련 질문을 받은 이정후는 “그때 아버지와는 상황이 다른 것 같다. 아버지는 시도를 해볼 만한 플레이였지만 오늘 난 본헤드 플레이였다. 뒤에 타자가 누구인지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다. 1~2점 차이에서 이런 실수가 나와선 안 된다. 좋은 경험으로 삼겠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1회 첫 타석부터 우측 2루타로 대표팀 첫 안타를 장식한 이정후는 3회에도 득점으로 연결된 2루타로 쐐기점의 발판을 마련했다. 첫 경기 중압감을 딛고 멀티 장타로 국가대표 부전자전을 증명했다. /waw@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