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캐릭터 경신했다는 평 감사하죠. 저는 이미 대길이를 지웠습니다."
배우 장혁이 '나의 나라' 이방원 역으로 '순수의 시대'에 대한 아쉬움과 '추노' 대길 역의 잔상을 완벽히 떨쳐냈다.
장혁은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JTBC 금토드라마 '나의 나라' 종영 기념 라운드 인터뷰를 진행했다.

'나의 나라'는 고려 말 조선 초를 배경으로 각자의 '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액션 사극이다.
극 중 장혁은 훗날 태종이 되는 왕자 이방원 역을 맡았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돕지만, 이용만 당하고 공신록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인물이다. 이에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나의 나라'의 이방원은 장혁에게 꼭 맞는 옷이었다. 그 어떠한 이질감도 어색함도 없었다. 이방원이 장혁이었고, 장혁이 이방원이었다. 인생 캐릭터를 경신했다는 평이 자연스럽게 따랐다. 이처럼 전율 돋는 명연기가 탄생할 수 있는 배경에는 '순수의 시대'가 있었다.
장혁은 "방원 역은 '순수의 시대'에서도 한 번 했었다. 그때 남은 아쉬움이 있어서, 언제 한 번 이방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의 나라'에 출연하게 됐다. 제가 촬영 전에 감독님한테 한 가지 부탁을 드렸다. 이미 역사에 나와 있는 이방원의 야심가 면모가 틀이 되면서도, 그의 이면을 감성적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행히 감독님이 그런 측면에서 열린 분이시라 받아주셨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는 시원한 부분이 있다"라고 밝혔다.


작품이 다르다고 해서 실존 인물의 기존 서사가 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똑같이 연기한다면, 한 캐릭터에 대한 재도전은 무의미하다. 장혁은 '순수의 시대'의 이방원과 또 다른 이방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감정 흐름에 더욱 집중했다.
"이방원의 실제 업적, 실록에 기록된 행동 등은 자료로 남아있지만, 그 상황에 이방원이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판타지예요. 실록은 승자가 기록한 역사이기도 하고, 너무나 많은 야사도 있고요. 실제로 본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어떻게 느끼고 선택했을지는 배우가 작품 안에서 가지고 가는 감정으로 표현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상황 속에서 내게 어떤 감정이 왔는지에 많이 집중했어요."
이방원에 대한 장혁의 해석은 더욱이 깊어졌다. 장혁은 "아버지와의 대척점에 서 있던 이방원은 결국 '피의 군주'가 된다. 왜 이방원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역사에서 발췌한 사실로만 풀려고 하지 않았다. 이면에 뭔가 있지 않았을까 했다. 아버지와 대립 안에서 단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느낌으로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것 같지 않았다. 이면에는 원래 그렇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방원도 상황이 거듭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런 쪽으로 주안점을 뒀다"라고 말했다.
'순수의 시대'로 접한 이방원, 이후 아쉬움으로 곱씹어봤을 이방원, '나의 나라'로 재해석한 이방원까지. '나의 나라'에서 장혁이 선보인 이방원은 4년을 거쳐 완성된 셈이다. 투자한 시간과 노력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1번 주연 못지않은 묵직함에 시청자들의 호평이 잇따랐다. 이에 장혁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감사하다. '확실히 감정의 널뛰기가 많은 캐릭터를 맡으면 더 좋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나의 나라'가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 이야기를 다뤘지만, 분명 새롭게 각색한 부분도 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얘기라서 전혀 동떨어지게 가면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대중이 이미 아는 캐릭터에 다른 측면을 보여주게 되면, 새로운 서사를 쌓아 올리는 것보다는 설득력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얘기했다.


장혁은 1997년 드라마 '모델'로 데뷔한 후, 22년간 군 생활로 인한 공백을 제외하고 연기를 멈춘 적이 없다. 특히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연차가 비슷한 배우에 비해 다수의 사극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사극도 현대극도 나름의 재미가 있어요. 그런데 사극이 조금 더 업다운을 많이 줄 수 있는 것 같아요. 사극 속 시대는 극단적이고, 여러 가지 제약도 많아요.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표현하는 대사는 확실히 밀도 있어요. 시대극만의 날 선 느낌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사극을 굉장히 좋아해요."
사극에 대한 애정이 충만하고, 그만큼 다작한 장혁이지만, 여전히 해보지 못한 역할이 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장혁은 "저는 조선 시대나 여말선초 인물 밖에 안 해봤다. 다른 시대를 해본 적이 없다"며 "또 저는 왕이 되기 전까지만 해봤다. 그래서 왕은 한번쯤 꼭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특히 장혁은 '추노'의 이대길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무려 9년 전 작품이지만, 여전히 일부 시청자들은 그에게서 대길이를 보기도 한다. '열일'해온 그에게는 다소 섭섭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장혁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연기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대길이를 항상 지웠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웠는데 다른 사람들이 못 지운 것 같아요. 하하. 하지만 제가 대길이를 연기하지 않아도, 대중이 어떻게 봐주는지가 중요하죠. 저는 대길이를 지우려고 했고, 또 지우려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서운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봐주시는 분들한테는 제가 이대길인 거죠." /notglasses@osen.co.kr
[사진]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 나의나라문화산업전문회사, sidusH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