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몸담은 독수리 둥지. 켜켜이 쌓인 시간들에 비해 한용덕(55) 감독의 짐은 단출했다. 지난 7일 NC전을 끝으로 자진 사퇴한 한 감독은 대전 홈구장 감독실도 빠르게 비웠다. 평소 감독실이 휑하게 느껴질 만큼 짐을 많이 들여놓지 않았다. 코치진 및 선수단 대규모 이동으로 짐을 실어 옮기기 바빴던 8일 대전야구장에 한 감독의 남은 짐은 없었다.
지난 2017년 10월 ‘고향팀’ 한화 지휘봉을 잡은 뒤 한 감독은 “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을 자주 했다. 부임 전까지 한화는 10년 연속 가을야구 실패로 ‘누가 와도 안 되는 팀’이란 소리를 들었다. 감독들의 무덤이기도 했다. 2018년 부임 첫 해 3위에 오르며 암흑기를 끊는 업적을 세웠지만 냉정하게 한화의 전력이 그 정도가 아니란 것을 한 감독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달콤한 성공의 여운이 남은 2018년 11월. 한 감독은 FA 시장에 나온 최대어 포수 양의지를 탐냈지만 구단과 논의 끝에 영입전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결정 주체는 한 감독이었다. 당시 그는 “감독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선수 욕심이 난다”면서도 “나무가 아닌 숲을 보고 싶다. 팀이 장기적으로 더 단단해지려면 내부적으로 시간을 갖고 더 육성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인내를 각오했다.


한 감독은 배팅볼 투수 연습생으로 시작해서 선수, 코치, 감독대행, 단장특보를 거치며 30년 넘게 한화에 몸담았다. 2015년 두산으로 ‘유학’을 갈 때도 “바깥에서 한화를 바라보면 또 다른 새로운 것들이 보이지 않을까”라며 친정팀 생각을 했다. 2017년 시즌 후 마침내 한화 지휘봉을 잡은 한 감독은 “누구나 팀에 애정이 있겠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여기 몸담아왔다. 집에 가면 식구들이 ‘한화가 우리를 다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그만큼 사명감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적을 내야 하는 냉정한 프로 세계에서 한 감독의 팀 애정은 ‘외사랑’이었다. 2019년 캠프 전 2군행에 반발한 권혁의 방출 요청, 시즌 전 이용규의 트레이드 요청 파문으로 고참 선수들과 불협화음을 빚자 한 감독의 리더십이 흔들렸다. 2018년 시즌 후반부터 고참들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한 감독의 소통 방법도 매끄럽지 않았지만, 세대교체를 위해선 피할 수 없는 과정이자 파열음이었다.
2018년 성공을 바탕으로 연장계약을 통해 한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구단 내 움직임이 있었지만 보고 체계 과정을 밟다 멈췄다. 2019년 팀 성적이 9위로 추락했고, 천당과 지옥을 오간 한 감독은 현실을 마주했다. 그는 “길게 보고 팀을 만들려했지만 성적이 안 좋으니 힘들더라. (압박감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컸다”고 토로했다. 30년 한화맨의 사명감으로 리빌딩과 세대교체를 각오했지만 성적 부진 앞에서 바람 앞 등불 신세였다.

지난겨울 구단에 외부 FA 영입을 요청했지만 결과물은 없었다. 3년 계약 마지막 해, 가뜩이나 전력이 약한 팀에서 ‘감독 레임덕’은 예견된 일이었다. 시즌 초반 5할에 가까운 승률로 버텼지만 구단 윗선에서 코치진 변경을 주문하면서 한 감독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성적으로 증명해낼 수밖에 없었던 한 감독은 베테랑 위주로 선수 기용 폭이 좁아졌다. 그럴수록 팀은 수렁에 빠졌고, 연패는 구단 역대 최다 ’14’까지 불어났다.
지난 주말 코치진 변경에 따른 촌극은 구단과 대립이 극명하게 드러난 대목이었다. 한 감독은 마지막 경기가 된 7일 NC전을 앞두고 이 문제에 대해 “따로 드릴 말씀 없다”고 말을 아끼며 “우리 팀은 앞으로도 계속 야구를 해야 한다. 미래를 보고 변화를 줘야 한다. (연패를 끊기 위해) 분위기 전환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사퇴를 암시한 한 감독은 경기 후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10년 잔혹사를 끊고 가을야구를 이끈 ‘레전드’의 허무한 퇴장이었다.
![[OSEN=고척, 손용호 기자] spjj@osen.co.kr](https://file.osen.co.kr/article/2020/06/08/202006082314772257_5ede57b585b21.jpg)
14연패 충격이 크지만 이제 개막 30경기만 소화한 시점에서 너무도 일찍 물러났다. 구단이 방치한 레임덕이 본격화되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감독이 물러났지만 구단도 화살을 피할 수 없다. 한 야구인은 “누가 봐도 한화 전력은 약하다.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울 수 없다. 선수들이 마치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동안 선수 전력을 제대로 모으지 못하고, 감독에게도 힘을 실어주지 못한 구단 윗선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waw@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