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안익수 선문대 감독, ‘파격’은 ‘대풍’을 낳았다…대학축구 최고 명장으로 ‘화려한 변신’
OSEN 조남제 기자
발행 2021.03.15 17: 45

프로 허울 벗어나 자신의 축구 철학 꽃피워
선문대학교, ‘대학 지존’으로 자리매김
33개월이 걸렸다. 비로소 첫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렸다. 다시 3개월이 흘렀다. 꽃은 활짝 피었고, 열매는 더욱 탐스러워졌다.

안익수 선문대 축구 감독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늗다. 훌륭한 농부는 역시 토양을 가리지 않았다. 탓하지도 않았다. 애로라지 열정만을 쏟아부었다. 온갖 정성과 흘린 땀은 풍성한 수확으로 되돌아왔다. 자연스러운 귀결로,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는 빛나는 결실이다.
프로축구 사령탑으로서, 또 각급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뚜렷한 인상을 새겨 넣었던 명장이 돌아왔다. 이번엔 활동 무대가 바뀌었다. 아마추어 마당인 대학축구다. 안익수 선문대학교 감독(57)이다.
이름에 얽매이지 않았다. 프로와 국가대표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기꺼이 종묘 배양에 나섰다. ‘파격적 변신’을 이룬 그의 손끝에서 여물어져 가는 농작물은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당연하다. 2연속 등정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U리그 왕중왕전에 이어 올 3월 춘계 대학연맹전 통영기에서, 선문대를 거푸 정상으로 이끌며 대학축구 지존에 올려놓았다. 그야말로 화려한 결실이다. 그 누가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으랴.
춘계 대학축구연맹전 통영기를 품에 안은 선문대학교 선수들이 안익수 감독을 헹가래를 치고 있다.
함께 한 일화의 처음과 끝, 그 인연은 줄기차다
2017년, 한국 축구계에서 돌연 ‘안익수’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이해 그라운드에서, 1999년 천안 일화(성남 일화→ 성남 FC 전신)에서 코치로 지도자에 입문한 이래 한시도 벤치를 떠나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안익수 감독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알면 알수록 힘든 지도자 세계를 절실히 느꼈다. 20년 가까이 내뿜기만 함으로써 소진했던 정열을 되찾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은 시기였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며 발전하는 지도 방법 체득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편, 독서와 등산 등으로 피폐해진 심신을 달랬다. 1년여의 침잠을 통해서, 제2의 지도자 인생을 살아갈 지혜와 힘을 쌓을 수 있었다.
2018년 3월 1일, 그는 거듭났다. 선문대학교 축구팀 사령탑에 앉음으로써 ‘그라운드의 지휘자’로 돌아왔다. 그와 일화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실감케 하는 복귀였다. 그는 일화의 처음과 끝을 같이했다. 선수로서 처음을 열었고, 감독으로서 끝을 지켰다. 
“일화 천마의 창단(1988년 11월) 멤버로서 1989년 프로 그라운드를 처음 밟았다. 지도자 생활도 일화(1999~2005년)에서 코치로 시작했다. 여자 축구(2006~2009년)에서 감독(대교→ 국가대표팀)의 역량을 기른 뒤, FC 서울(수석 코치·2010년)과 부산 아이파크(감독·2010~2011년)를 거쳐 2012년 일화(감독)로 되돌아왔다. 어머니의 품 같은 고향의 아늑함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2013시즌이 끝나고, 천마가 비상을 멈췄다. 시민 구단인 성남 FC로 옷을 갈아입으며, 천마의 질주는 끝났다. 그도 둥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한민국 U-20대표팀 감독으로 새 지휘봉을 잡았다.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2007~2009년)에 이어 두 번째 ‘태극 군단’ 사령탑이었다.
일화와 맺은 연도 다한 듯했다. 선수와 지도자로서 ‘일화 왕조’를 구축하는 데 일익을 맡았던 그로선 진한 아쉬움에 휩싸였다. 선수(1993~1995년)로서 또 지도자(2001~2003)로서 두 번씩이나 3연패를 이루며 천하를 평정한 일화의 영광을 함께했던 그였지 않았나?
그러나 인연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일화를 운영했던 통일교 재단이 창학한 선문대학교(총장 황선조)가 함께 나아가자고 손을 내밀었다. 애천(愛天)·애인(愛人)·애국(愛國)의 건학 이념을 표방한 선문대에, 축구 철학이 정립된 명장의 이미지를 굳게 쌓은 그는 무척 걸맞은 존재였다. 일화와 끊어진 듯했던 연을 다시 맺은 그는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절치부심했던 순간순간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되씹으며 아마 지도자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2020 U리그 왕중왕전에서 우승하며 대학 무대 평정을 예고한 선문대학교가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과정과 기본 소양 중시 지도 철학, 대풍의 자양분 되다  
축구계에서, 안익수 감독은 ‘철학자’ 또는 ‘대학 교수’로 불린다. 확고한 지도 철학과 흔들리지 않는 소신을 바탕으로, 선수를 가르치고 기른다. 팀 성적에 연연해 현실과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축구 선수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라고 역설하는 데에선, ‘우직함’마저 엿보인다.
“과정이 뒷받침되지 않은 결과는 모래 위에 세운 누각일 뿐이다. 튼실한 초석이 깔린 건물이 오래가지 않겠는가? 그 맥락에서, 대학 선수로서 기본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가르쳤다.”
이를 실현키 위해 그는 기술 습득에 치중하는 선수들에게 수시로 “영어와 컴퓨터 등을 공부하는 한편 틈틈이 독서도 게을리하지 마라”라고 독려한다. 머리를 쓸 줄 알 때 실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 있다는 지론에서 나온 지도 방식이다.
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늘 스스로를 닦달한다. 독서는 축구와 더불어 그의 인생을 지탱하는 양대 축이다. 일화 코치 시절에, 시간을 쪼개어 석사(용인대학교 체육교육과)와 박사(명지대학교 체육학과) 학위를 취득한 데서 엿볼 수 있듯, 그는 항상 책과 더불어 사는 ‘성실의 아이콘’이다.
“삶의 지혜가 고갈될까 우려한다. 빈 곳간을 채운다는 심정으로 책을 항시 곁에 두려 한다.”
책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삶의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지인의 생일이면 책을 선물하곤 한다. 선문대가 스카우트한 선수의 출신 학교에 도서를 기증(70~100권)하는 것도 그의 생각에서 비롯된 좋은 관례다.
그의 ‘기초론’은 선문 유스 FC(U-12) 운영에서도 헤아릴 수 있다. 축구팀 중장기 발전을 꾀하기 위해 그가 제안해 창단된 이 팀은 선문대가 기치로 내세운 ‘주산학(住産學)’의 실천책이기도 하다. 지역 주민-지역 산업-학교가 하나로 어우러져 지역 발전을 도모한다는 주산학의 좋은 모델로 손꼽힌다.
선문 유스 FC(U-12) 운영은 지역민(천안·아산)에게서 호평받고 있다. 1주일에 3회(월·수·토) 열리며 지역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 주는 ‘나눔의 장’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선수들이 직접 어린이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지도의 어려움을 절로 깨닫도록 했다. 가르치고 배움을 통해 스승과 제자가 함께 성장하는[敎學相長·교학상장] 뛰어난 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알바비’도 지급했다. 현실 상황을 받아들이고 벌어들인 소득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대학 축구엔, 바야흐로 ‘선문대 시대’가 열렸다. 3년에 걸쳐 그의 철학이 녹아들며 최강으로 자리매김했다. 소리 높여 부르는 ‘대풍가(大豐歌)’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에겐 ‘대학 최고 명장’의 영예가 안겼다.
그는 어떤 유형의 장수일까? 지장, 맹장, 용장, 덕장 가운데 어떤 칭호가 어울릴지 궁금했다. 아울러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우문(愚問)을 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삶을 열심히 개척해 가는 선수에겐, 편안한 감독으로 비칠 듯싶다. 그러나 인생을 게을리 사는 선수에겐, 무서운 감독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최규섭(프리랜서)
[사진] 안익수 감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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