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일본 고치에서 열린 LG 트윈스의 가을 마무리캠프 때였다. 류중일 당시 LG 감독은 190cm가 넘는 거구의 타자를 향해 “네가 강백호 친구라고? 강백호가 3번 칠 때 네가 4번을 쳤다고 했나”라고 말을 걸었다. 이후 류 감독은 ‘덩치가 좋다’, ‘열심히 하라’는 덕담을 건넸다.
강백호 친구 이재원이 주인공이었다. 강백호와 이재원은 서울고 시절 3~4번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강백호는 2018년 KT 데뷔 첫 해 단숨에 1군 무대에서 장타력을 뽐내며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8년 2차 2라운드(전체 17순위)로 LG 지명을 받은 이재원은 2018년 1군 데뷔를 하지 못했고 2군에서 7경기 타율 3할8리 1홈런을 기록했다.
이재원이 입단 4년 만에 ‘강백호 친구’에서 거포 유망주로서 틀을 깨기 시작했다. 이재원은 손목 힘이 좋고 파워는 으뜸이다. 그는 “고교 때 비거리는 강백호보다 더 멀리 나갔다”고 수줍게 말했다.

그러나 프로 무대 적응은 만만찮았다. 지난해 1군에 데뷔 했는데, 20타수 1안타(타율 .050) 11삼진을 기록했다. 지난해까지 이렇다할 성적을 보여주지 못하자, 병역 의무를 마치기 위해 군 입대를 준비했다. 빨리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제대로 승부를 보자는 계획이었다. 이재원은 상무야구단에 응시했는데, 지난 2월 최종 발표에서 탈락했다.
어쩔 수 없이 군 입대를 1년 미뤄야 하는 처지가 됐고, 2군 스프링캠프에서 시즌을 준비했다. 2군 무대에서는 점점 성과를 보였다. 2020년 2군 홈런왕(13개)을 차지했던 이재원은 올해도 7월초까지 2군에서 뛰며 16홈런으로 1위에 올라 있다.
7월초 드디어 1군 콜업 기회가 왔다. 이형종, 이천웅 등이 부진하자 2군에서 괜찮은 타격 성적을 보여준 이재원을 콜업했다. 이재원은 콜업 첫 날인 7월 5일 한화전에 선발 출장해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잇따른 우천 취소, NC 구단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서 리그가 중단됐다. 모처럼 올라온 1군 무대, 여건은 좀처럼 기회를 잡기 쉽지 않아 보였다.
도쿄올림픽이 끝나고 8월 중순 리그가 재개됐고, 이재원은 여전히 1군 엔트리에 남아 있었다. 선발 출장의 기회를 받으면서 멀티 히트를 치고 지난해와는 달리 컨택 능력도 좋아졌다. 올 시즌을 시작하면서 타격폼을 수정, 상체를 약간 앞으로 웅크리고 배트도 기울였다.

1군에서 계속 기회가 주어지자, 이재원은 최근 팀의 4연승 기간에 매 경기 결정적인 안타로 연승 행진에 기여하고 있다. 지난 26일 삼성전에서는 대수비로 교체 출장, 0-2로 뒤진 6회 2사 1,2루에서 우전 적시타로 추격의 1타점을 올렸다. 동점의 발판이 되는 적시타였다.
3-2로 앞선 8회 2사 후 이재원은 좌측 펜스 상단을 맞는 2루타로 때렸다. 이어 이형종의 적시타로 4-2가 됐고, LG가 4-3으로 승리하면서 이재원의 득점은 사실상 결승 득점이 됐다.
27일 삼성전에서는 0-1로 뒤진 7회 2사 1,3루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무실점으로 호투하던 삼성 선발 원태인 상대로 동점 적시타를 때렸고, 원태인을 강판시켰다. 이후 LG는 삼성 불펜을 공략해 3-1로 역전, 승리했다.
이재원은 28일 키움전에서도 1-2로 뒤진 7회 무사 1루에서 좌측 2루타로 무사 2,3루 역전 찬스를 만들었다. 보어가 2타점 우전 안타를 때려 3-2 역전승을 거뒀다. 이재원의 2루타가 값진 역할을 했다.
29일 키움전에서는 1회 1사 2,3루에서 볼넷을 골라 만루로 연결했다. 1회 4점을 뽑은 LG는 2회 2사 만루에서 이재원의 2타점 우전 안타로 6-0으로 달아났다. 이후 안타가 계속돼 11-0으로 앞서며 승기를 잡았다. 이재원의 안타로 봇물이 터졌다.
이재원은 올해 15경기에서 타율 3할2푼(50타수 16안타) 6타점 OPS .838을 기록하고 있다. 홈런 2개, 2루타 2개 등 장타율은 .480이다. 점점 타구의 질이 좋아지며 장타가 늘어나고 있다.

이재원은 심리적으로 자신감, 여유를 갖게 됐고 이는 타석에서 좋은 타구를 만들어내는 선순환이 되고 있다. 그는 작년에 대타로 부진했을 때와 최근 선발 출장을 비교하자 “작년에는 결과를 만들려고 신경썼다. 지금은 감독님이 기회를 많이 주시면서, 심적으로 조금 편안해졌다. 좋은 결과를 안 내도 팀에 피해만 끼치지 말자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든 선수들이 경기 출장에 욕심이 나기 마련이다. 이재원은 “욕심이 없진 않다. 그렇지만 내 욕심을 낼 건 아니다. 팀이 제일 중요하다. 상황에 맞게 감독님이 지시하는 대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제 강백호의 친구가 아니라 LG의 거포 유망주로 점점 야구팬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류지현 감독은 이재원을 향해 “그동안 실패를 통해 멘털이 작년보다 좋아졌다. 기술적인 부분도 달라졌다"며 "자신의 것이 정립된다면 박병호처럼 포텐이 터진 선수가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지금 그런 과정에 있다”고 기대했다.
LG는 과거 김상현, 박병호, 정의윤 등 거포 자질을 지닌 타자를 키우지 못하고, 다른 팀으로 떠나보낸 뒤 성공하는 것을 지켜봤다. LG의 토종 거포 한풀이를 이재원이 풀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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