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투호, '그곳'서 징크스 깨며 대야망 실현 눈앞에[최규섭의 청축탁축(淸蹴濁蹴)]
OSEN 조남제 기자
발행 2021.11.17 08: 02

9년 5개월 9일이 걸렸다. 얼마나 고대했던 원정 승리였던가. 아시아 맹주라 자처하는 대한민국 축구에겐 참기 힘든 오욕의 나날이었다.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의 장에만 오르면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던 꼬리표, ‘원정 무승 징크스’였다.
2021년 11월 17일(이하 한국시간) 마침내 악운을 떨쳤다. 9년 전, 마지막 승리를 맛봤던 카타르 도하에서 노래한 감격의 승전가였다. 또한 대풍가였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가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대야망을 한결 부풀린 개선가였다. 3-0. 이라크 골문을 맹폭하며 세 골씩이나 터뜨렸다.
도하는 역시 ‘아름다운 인연’의 도시였다. 28년 전, 환희의 전율을 만끽하게 했던 곳 아닌가. 드라마보다 더한 플롯을 연출하며 연속 본선 진출에 박차를 가한 한국으로선 잊을 수 없는 그곳, 도하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도하의 기적’, 한국과 일본의 운명을 ‘희비쌍곡선’으로 빚다
1993년 10월 28일, 운명의 날이었다. 19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티켓 2장의 주인공을 가리고 있던 베일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걷혔다. 아시아 최종 예선 마지막 날, 한국-북한, 일본-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이란의 세 경기가 서로 다른 구장에서 동시에 킥오프됐다. AFC(아시아축구연맹)가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승부 담합을 피하려고 취한 방책이었다.
마지막 한판을 남겨 두고 한국은 절박했다.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이상 승점 5)에 뒤진 3위(승점 4)로서 자력으로는 본선 티켓을 따낼 수 없었다. 우리는 무조건 골을 많이 터뜨린 뒤 두 팀 가운데 한 팀이 지거나 비기기를 바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다득점이 절실했던 한국은 북한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후반전에, 고정운→ 황선홍→ 하석주가 잇달아 북한 골문을 열어젖히며 3-0으로 완승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칼리파 국제 경기장 그라운드를 걸어 나오는 한국 선수들의 얼굴에선 웃음을 찾을 수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에 4-3으로 이기며 경기를 끝냈다. 일본은 경기 종료를 눈앞에 두고 이라크에 2-1로 앞서고 있었다. 아시아에 배정된 2장의 티켓 주인은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로 거의 굳어졌다.
한순간이었다. 믿기 힘든 이적(異蹟)이 일어났다. 경기 종료 10초 전 내준 코너킥 상황에서, 이라크의 자파르 움란의 헤더가 일본 골망을 꿰뚫었다. 2-2.
돌연, 벤치 쪽으로 걸어오던 태극 전사들은 환성을 터뜨렸다. “일본과 이라크가 비겼다.”라는 벤치의 전언에, 분위기는 180° 돌변했다.
신은 마지막 순간에 한국을 택했다. 우리가 골 득실차(5-3)로 일본을 3위로 밀어내며 3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꿈을 이뤘다. 한국엔 ‘도하의 기적’이었다. 반면, 일본엔 ‘도하의 비극’이었다.
[사진]손흥민 /대한축구협회
징크스 타파 발판 삼아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금자탑 세운다
참으로 공교롭다. 그리고 역시 도하와 공통 요소로 엮인다. 한국 축구와 묘한 인연의 끈으로 단단히 묶인 듯싶다.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한국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무대는 도하에서 펼쳐졌다. 2012년 6월 8일,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의 장에서 만난 카타르가 상대 역이었다. 한국은 그때 이근호(2골)-곽태휘-김신욱의 골을 묶어 4-1로 대승했다.
그 뒤 한국은 지독한 원정 징크스에 시달렸다. 3개월여가 흐르고, 타슈켄트에서 맞붙은 우즈베키스탄전(2-2 무)이 불운의 출발점이 됐다. 이어 테헤란에서 열린 이란전에서 0-1로 졌고, 이듬해 베이루트에서 격돌한 레바논전에선 1-1로 비겼다(표 참조).
2018러시아 월드컵 최종 예선 전장에선 더욱 심한 불운에 맞닥뜨렸다. 종전 5개국씩 2개 그룹에서 6개국씩 2개 그룹으로 체제가 바뀐 첫 마당에서, 2무 3패의 깊은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만만한 상대였던 카타르에마저 2-3으로 무너졌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사진]이재성 /대한축구협회
2022 카타르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광이 비쳤다. 이란과 맞붙은 첫 원정 경기에서 단초가 열렸다. 손흥민이 12년 만에 원정 이란전에서 골을 터뜨렸다. 2009년 6월,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박지성이 아자디 스타디움의 굳게 닫힌 이란 골문을 연 뒤 실로 오래간만에 맛본 감격의 골이었다.그리고 드디어 원정 무승 징크스를 깨뜨렸다. 그것도 아주 시원하게 씻어 냈다. 16일 자정에 킥오프된 이라크전에서, 3-0으로 통쾌하게 승전고를 울렸다. 이재성(전반 33분)이 물꼬를 트고, 손흥민(후반 29분·PK)과 정우영(후반 34분)이 잇달아 골을 낚으며 화려한 대승을 장식했다.
손흥민은 더욱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이라크전이 열린 타니 빈 자심 스타디움은 자신이 A매치 데뷔골을 터뜨렸던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10년 10개월 전인 2011년 1월 AFC 카타르 아시안컵 조별리그 인도전(4:1승)에서, 손흥민은 태극 전사로서 득점 신고식을 올렸다.
9전 5무 4패, 치욕의 징크스는 깨졌다. 그것도 만만찮은 적수인 이라크(역대 통산 21전 7승 12무 2패·한국 우세)를 제물로 삼아 대첩을 거뒀으니 감격의 깊이가 더욱 깊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통쾌한 1승과 불운 타파가 어우러지며 월드컵 본선 10회 연속 진출의 꿈은 더욱 영글어 간다.
[사진] 정우영/ 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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