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라소 출신 마무리 투수 켄리 잰슨 이야기
[OSEN=백종인 객원기자] 그의 나이 6살 때다. 형을 졸졸 따라다녔다. 매일 이상한 공놀이다. 동네 아이들, 아니 섬나라 모두가 푹 빠졌다. 풍족하지 못한 시절이다. 글러브 가진 사람이 왕이다. 주인과 친해야 낄 수 있다. 몇 개 안되는 걸로 돌려쓴다. 그나마도 모두 오른손잡이용이다.
6살짜리는 왼손잡이다. 하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그냥 왼손으로 받고, 오른손으로 던졌다. 30년 전, 카리브해의 작은 섬. 네델란드령 퀴라소(Curacao) 얘기다. 온 나라가 매일 야구 중계에 매달렸다. 그곳 출신 앤드루 존스 때문이다. 마치 박찬호의 다저스 같다. 그들에게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그렇다.

그 소년이 35살이 됐다. 그리고 바로 그 팀 유니폼을 입었다. FA로 이적한 켄리 잰슨(35)이다. “어린 시절 이 팀을 응원하며 꿈을 키웠다. 큰 형(아들리 잰슨)도 이곳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다. 난 프레디 맥그리프의 열렬한 팬이다. 앤드루 존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친 2개의 홈런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켄리 잰슨, ATL 입단 소감 중에서)
물론 흡족함만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아쉬움이 크다. 17년간 정 든 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17살 때부터다. 줄곧 다저스였다.
LA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3년 계약을 원했다. 그러나 다저스는 사치세를 구실 삼았다. 협상은 결렬됐다. 떠나는 순간이다. 섭섭함이 오죽했겠나. 하지만 쿨하다. 가장 젠틀한 이별사를 남겼다. “인생의 절반을 이 조직의 일원으로 살았다. 17살짜리 퀴라소 소년이 남자가 되고, 훌륭한 아버지와 남편이 되도록 가르쳐준 팀이다. 여긴 대단한 곳이고, 최고의 조직이다.” (잰슨은 혼자 애틀랜타로 이사했다. 부인과 아이들은 LA에 남았다)

밀려나는 것. 어쩌면 인생 내내 그랬다. 왼손잡이 글러브가 없어서 오른손으로 던졌다. 시작은 유격수였다. (동네에) 더 잘하는 아이가 나타났다. 안드렐톤 시몬스(LA 에인절스)다. 떠밀려 1루로 갔다. 그러다 포수가 됐다. 덩치가 크다는 이유였다.
다저스 입단 때도 포수였다. 그런데 타격이 영 시원치 않았다. (스스로 말처럼) 싱글A 공도 못 쳤다. 그래도 앉아쏴 만큼은 최고였다. WBC 본선(2009년, 네덜란드 대표) 때 윌리 타베라스, 라이언 브론 같은 주자를 연거푸 2루에서 잡았다.
‘투수 한번 해볼래?’ 의문문이지만, 명령문이다. 통보나 다름없다. 4시간 만에 결정됐다. 포수 장비를 반납했다. 곧바로 전향 작업이다. 첫 캐치볼 상대가 운명적이다. 마이크 보젤로라는 불펜 포수다. 몇 개 받아보더니 정색한다. “너, 이 공 어디서 배웠어?” “배운 적 없는데요.” 그건 커터였다. 단번에 알아차린 보젤로는 양키스 출신이다. ‘커터의 장인’ 마리아노 리베라의 공을 받아주던 불펜 포수였다.

퀴라소 시절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막노동으로 5남매를 키웠다. 그러다가 공사장에서 크게 다쳤다. 자리에 눕자 어머니가 생계를 맡았다. 여행사 가이드 일이었다. 매일 새벽 눈물의 기도다. 그걸로 하루가 시작됐다. 그 모습을 지켜본 12살 막내 아들이 그렇게 다짐했다. “내 힘으로 어머니와, 우리 가족을 승리하게 만들 거야. 반드시.”
다저스 입단 후 마이너리그 시절부터다. 페이 체크(월급)는 모두 고향으로 보냈다. “이제 그만 됐다. 너도 좋은 차, 멋진 옷 입는 데도 쓰도록 하렴” 어머니의 만류도 소용없다.
그 시절, 송금한 곳. 그 주소가 퀴라소의 빌렘스타드 카야 코코리시 74번지(Willemstad Kaya Kokolishi 74)다. 다저스에서나, 브레이스로 옮겨서도. 백넘버에 새겨 잊지 않으려 한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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