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가너 머리 위에 있는 김하성의 도루
OSEN 백종인 기자
발행 2022.04.09 11: 13

[OSEN=백종인 객원기자] 아직은 평화롭던 3회 초다. 원정 팀 공격이 8번부터다. 선발 투수의 마음은 뻔하다. ‘쉽게, 쉽게.’ 8~9번은 빨리 퇴근시키자. 아웃 2개는 기본이다. 투구수도 줄이고 싶다. 일단 스트라이크 2개를 잡고 들어간다. (10일 샌디에이고-애리조나 개막전)
그런데 웬걸. 여기부터 꼬인다. 줄기찬 몸쪽 공세를 잘도 버틴다. 회심의 승부구는 파울이다. 벗어나면 꿈쩍도 않는다. 결국 볼넷이다. 괜히 11개나 던졌다. 다행히 다음 타자는 좌익수 플라이로 잡았다. 1사 1루.
이때부터 일이 시작된다. 타석엔 우타자(1번 오스틴 놀라)가 들어섰다. 초구 스트라이크. 그리고 2구째다. 3루 코치가 부지런히 사인을 낸다. 지켜보던 타자가 흠칫 놀라는 얼굴이다. 연신 붙였다, 뗐다 반복하던 장갑 찍찍이가 잠시 멈춘다. ‘내가 본 게 맞나?’ 그런 표정으로 투수를 바라본다.

이윽고 2구째다. 동시에 1루 주자가 스타트한다. 볼은 몸쪽 높은 코스다. 포수가 재빨리 2루에 쏜다. 그러나 한참 여유 있다. 아예 태그 플레이 타이밍도 없다. 넉넉한 세이프다.
뭐지? 이건? 물음표가 100개는 생긴다. 팽팽한 상황에 2루 단독 도루다. 그것도 너무 쉽게 성공시킨다. 상대가 만만한가? 절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매디슨 범가너다. 요즘 좀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최고 레벨이다. 게다가 좌완 아닌가. 1루 주자에게 호락호락할 리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기습적인 2루 도루다. 기획 과정을 추론해보자. 몇 가지 요소들이 관찰된다.
①    몸쪽에 집착하는 범가너
일단 볼배합의 특성이 확연했다. 우타자의 몸쪽 승부를 즐기는 스타일이다. 사이드암 형태로 던지는 각도여서, 안쪽 대각선 공격이 많다. 포수는 바깥쪽이 편하다. 몸쪽은 송구 자세에 제약이 많다.
②    일찌감치 자리잡는 포수
게다가 코스를 너무 일찍 드러낸다. 사인 교환이 끝나면 바로 자리잡는다. 포수(카슨 켈리)가 미리 몸쪽에 붙어 앉는다는 말이다. 보통은 이러면 안된다. 투구 동작이 시작된 후에나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주자에게 힌트가 안된다.
결국 ‘이번에 몸쪽이야’라고 (주자에게) 알려주고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걸 모를 리 없다. 아마도 배터리간의 합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포수는 목표점이다. 늦게 움직이면 투수에게는 불편하기 마련이다. 즉 범가너가 안정적인 로케이션을 위해 그렇게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③    질펀하게 앉아서
포수의 자세다. 실전에서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는다. 이건 상식을 초월한다. 왜? 그만큼 일어서는 (송구) 동작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비교 장면을 보시라. 이날 도루 저지를 성공한 야디 몰리나의 자세다. 엉덩이를 들고 준비한다. 그래야 0.1초의 싸움에서 가능성이 생긴다.
④    매드범의 오른쪽 무릎
1루 주자에게 좌투수가 불편하다. 우선 눈에 보이는 위치다. 다음은 구분이 어렵다는 점이다. 이번이 견제구인지, 투구인지 모른다. 그래서 스타트가 쉽지 않다. 그런데 범가너는 아니다. 뻔하게 드러난다. 키킹 동작을 보시라. 오른쪽 다리가 올라가는 순간이다. 여기서 각도가 문제다. 똑바로 들면 헷갈린다. 하지만 그는 2루쪽으로 꺾는다. 이건 반드시 홈을 향한 투구라는 뜻이다. 만약 이 자세로 1루에 견제구를 던지면 보크가 선언된다. 즉, 무릎을 꺾는 시점이 주자의 스타트 타이밍이 된다는 뜻이다.
결국 이 도루는 선취점의 발판이었다. 직후 오스틴 놀라의 타구는 평범한 유격수 땅볼이다. 김하성이 그냥 1루에 있었다면 손쉬운 6-4-3 또는 6B-3의 병살 플레이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어지며 만루→밀어내기로 1점이 올라갔다. 그리고 범가너 자신에게도 마지막 이닝이 됐다.
공략법은 준비된 것이리라. 평소 습성을 연구해 얻은 성과로 믿는다.
*  범가너 (통산) – 도루 허용 120개, 저지 59개 (67.0%)
*  카슨 켈리(포수) – 도루 허용 96개, 저지 33개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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