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거인의 이상한 도루...잠실 햇살의 눈부신 어시스트
OSEN 백종인 기자
발행 2022.05.02 16: 32

[OSEN=백종인 객원기자] 1-0이던 4회 초 공격이다. 1사 1루. 타석에는 DJ 피터스다. 카운트는 1-2로 투수편이다. 4구째. 갑자기 1루 주자가 달린다. 동시에 포수가 공을 놓친다. 2루는 당연하다. 정훈은 편안하게 3루까지 도착했다. 1사 1루가 1사 3루로 달라진다. 이어진 좌익수 희생플라이. 스코어는 2-0이 된다.
어제(1일) 잠실 경기의 승부처다. 원정 팀은 여기서 승기를 잡았다. 결국 트윈스전을 싹쓸이했다. 엘롯라시코 스윕은 3598일 만이다. 이맘 때 2위 역시 10년 만이다.
다 좋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도루 말이다. 승리에 결정적인 달리기가 맞다. 하지만 도통 납득이 어렵다. 기습이라고 하기에는 뜻밖이다. 앞뒤가 안 맞는 구석이 많다. 수상한 점 투성이다. 그런데 결행됐다. 그리고 성공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직전 상황이다. 정훈이 타석에 있을 때였다. 카운트 3-1에서 1루 주자가 스타트했다. 2루 훔치기는 미수에 그친다. 유강남의 송구가 조기 배송된 탓이다. 몇 걸음 앞에서 아웃이다. 전준우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철수한다.
“뭔가 사인이 맞지 않은 느낌인데요. 지금 임찬규 선수의 제구가 잘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단독 도루(실패)는 허무한 작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SBS Sports 이동현 해설위원)
그런 흐름 속이다. 객사한 기억이 몇 분 전이다. 또다시 무리한 시도는 어렵다. 무엇보다 주자는 육상부가 아니다. 12시즌 동안 두 자릿수 도루는 2번 뿐이다(2015년 16개, 2020년 11개). 게다가 엊그제 다쳤다. 종아리 통증으로 전날 경기는 선발 출장에서 제외됐다.
앞뒤 정황이 이러니 트윈스도 별로 신경 안 썼다. 임찬규는 1루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타석(피터스)에만 집중한다. 어쩌면 방치 수준이다. ‘갈 수 있겠어? 어디 한 번 가보시던가.’ 하는 느낌이다.
문제의 4구째. 1루 주자가 2루로 간다. 확신에 찬 출발이다. 무엇이 이런 도발을 가능케했나.
일단 볼배합이다. 카운트 1-2였다. 외국인 타자에게 정면 승부는 쉽지 않다. 유인구 확률이 높다. 즉 변화구 타이밍이라는 뜻이다. 도루 성공 기대치가 상승한다. 그렇다고 확신은 어렵다. 치고 달리기 등을 대비한 피치 아웃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데도 결행됐다. 이건 뭔가 있다는 말이다. 유력한 추정은 ‘사인 캐치’다. 포수의 신호를 파악했다는 뜻이다. 어떻게? 관찰(觀察)을 통해서다. 센스 있는 1루 주자면 가능하다. 투수 견제에 신경 쓰면서, ‘힐끗’ 동작으로 포수 손가락을 볼 수 있다. 1개는 직구, 2개는 슬라이더, 3개는 커브…. 이런 식으로 짐작한다.
실전을 보시라. 앞선 3구째도 커브였다. 108㎞짜리에 피터스가 선풍기를 돌렸다. 다음 공도 같은 사인이다. 손가락 3개가 펴진다. 또다시 커브가 예고된 셈이다. 낮게 떨어지면 포구가 쉬울 리 없다. 2루 송구에도 어려움이 당연하다. 기습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들이다.
한 가지 더. 제갈공명의 동남풍과 비슷하다. 하늘의 도움이다. 당시 시간은 오후 3시 무렵. 화사한 봄 햇살이 잠실 구장을 덮었다. 우익수에서 포수 쪽이다. 하필 유강남의 손가락에 밝은 조명을 때려준다. (1루 주자 입장에서 손가락이 모두 보일 필요는 없다. 새끼손가락 모양만으로도 커브가 가늠된다.)
포수 출신 조범현 전 감독이 강조하던 대목이다. “1루에 주자가 있을 때 포수는 오른쪽 다리로 잘 가리고 사인을 내야한다. 그리고 1루 주자의 시선도 잘 살펴야 한다. 혹시나 자신(포수)을 보고 있는 지 확인하면서 사인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분명히 구별할 점이 있다. 문제가 될 행동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사인 훔치기와는 다르다. 룰을 어긋나는 건 전자 장비를 통한 행위다. 혹은 주자가 이를 타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문율로 금지한다. 빈볼, 벤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다만 주자가 이를 파악해 자신의 플레이에 활용하는 건 다르다. 그건 센스의 영역이다. 스마트한 플레이라고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감추지 못한 수비 쪽이 귀책 사유다.어쨌든. 실전은 대성공이다. 커브(111㎞) 타이밍을 정확하게 잡았다. 때마침 유인구는 낮게 떨어지는 원 바운드였다. 포수는 (주자를 잡으려고) 블로킹 대신 캐치를 시도했다. 그러다가 뒤로 빠트렸고, 3루까지 허용한 것이다.
자이언츠는 상승세다. 대부분 지표도 안정적이다. 팀 타율(0.266) 1위, 팀 ERA(2.88) 2위를 기록 중이다. 반면 육상에는 취약하다. 도루 성공이 8번, 실패가 9번이다. 성공률(47.1%)은 현저한 꼴찌다. 그런데 결정적 스틸로 스윕을 달성했다. 거인의 역설이다. (정훈의 올 시즌 도루는 2개다. 모두 이번 트윈스 전에서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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