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내내 잠잠하다. 2시간 넘도록 그랬다. 7-0의 일방적인 스코어다. 그러던 7회 초, 미약한 흐름이 생긴다. 안타, 2루타, 볼넷. 베이스가 꽉 찼다. 3루쪽에 모처럼 활기가 돈다. 응원가와 함성이 이어진다. 내야 안타로 1점이 생겼다.
계속된 2사 만루. 오태곤 타석이다. 화면에 자막이 뜬다. ‘통산 만루홈런 2개’. 긴장감이 돈다. 카운트 1-2에서 4구째다. 131㎞ 슬라이더가 몸쪽에 꽂힌다. 타자는 움찔. 구심의 손이 올라갔다. 동시에 단호한 콜이다. 삼진. 추격은 끊겼다. (3일 잠실, LG-SSG전)
이번엔 1루쪽이다. 안도의 갈채가 쏟아진다. 환호가 메아리 친다. 마운드의 주인공 케이시 켈리가 내려온다. 1위팀을 잠재운 호투였다. 갈기를 휘날린 역투였다. 짙은 갈색, 유려한 머리결이다. 102개의 투구를 마쳤다. 팬들을 향해 박수를 보낸다.
2020년 5월 16일 잠실 키움전(6이닝 무실점) 이후 67경기 연속이다. 5이닝 이상을 책임졌다. 누구도 해내기 힘든 위업이다. 그렇게 헨리 소사의 40승을 넘어섰다. 팀내 최고의 외국인 투수로 등극했다.
경기 후 <연합뉴스> 기자가 농담을 건넨다. ‘더워 보인다. 이발 생각은 없나?’ 수염과 머리 얘기다. 당사자도 동의한다. “솔직히 자르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머리를 기른 뒤로 잘 던지고 있다. 자르지는 못할 것 같다.”

2017년 가을. MLB 관련 커뮤니티가 시끌시끌하다. SNS의 8초짜리 동영상 때문이다. 호세 레예스(당시 뉴욕 메츠)가 올린 게시물이다. 이런 경고문으로 시작된다. “행복했던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간직하고 싶은 분들은 절대 클릭하지 마시오.”
갑자기 화면 속에 말쑥한 청년이 등장한다. 멋쩍게 웃는 모습이다. 다시 레예스의 멘션이다. “새로운 팀 메이트를 소개합니다.” 트레이드야?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수많은 물음표는 이내 경악으로 바뀐다.
맙소사. 헤어컷을 단행한 제이콥 디그롬이었다. 토르(노아 신더가드), 로버트 구셀먼, 케빈 맥고완과 함께 금발의 왕국을 이끌던 주역이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배신(?)한 것이다. 팬들은 슬픔에 빠졌다. 애도하는 목소리들이다. ‘왜? 뭣 때문에? 어째서?’ ‘굿바이 롱 헤어.’ ‘오, 나의 왕자님.’ ‘록 스타는 어디로.’ 절망과 한탄이 쏟아진다.
당사자도 이런 반응을 모를 리 없다. 한 달쯤 지나서다. 해명이 나왔다. “투구폼 때문이예요. 긴 머리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어쩌면 2마일 정도는 차이날 거예요.” 설마. 처음에는 변명이려니 했다. 팬들의 섭섭함을 달래기 위한 거짓말 같았다. 그런데 아니다. 95.8마일이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이듬해 96.7마일이 됐다. 0.9마일이 증가한 셈이다. 회사원 스타일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 해 (2018년) NL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 디그롬의 구속 증가가 단발의 영향이라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
* (투수의) 휘날리는 머리가 시선 집중을 방해한다는 타자들도 있다. 디그롬이 한동안 장발을 고집한 이유이기도 하다.

트윈스 팬들에겐 강렬한 기억이 있다. 긴 머리 에이스에 대한 추억이다. 한 마리 야생마였다. 거침없이 질주했다. 갈기를 휘날리며 적진을 누볐다. 그의 47번은 임시 결번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아름다운 컬(curl)이 나타났다. 갈색의 풍성함이 빛난다. 롱 헤어 뿐만이 아니다. 그에게 자주 수식되는 또 하나의 영어가 있다. 워크 에식(work ethic)이다. ‘직업 정신’ 정도로 표현할 말이다.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팀을 위해 미국행을 포기한 일이 유명하다.
그런 그이기에 무더위에도 포기할 수 없다. 헤어 스타일은 곧 숭고한 루틴이다. 물론 농담이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머리를 짧게 자르면 슬픈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하는 딸이 아빠를 못 알아볼 지 모른다.”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 goorada@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