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투의 ‘이강인 운용술’, 오버랩되는 박종환의 ‘독기 키우기’[최규섭의 청축탁축(清蹴濁蹴)]
OSEN 조남제 기자
발행 2022.11.30 07: 55

2022 카타르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에서, 파울루 벤투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의 용별술은 뜻밖이다. 2018년 8월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래 보였던 용병술과는 다소 결이 다른 듯하다. 특히, 이강인 기용에 있어선 ‘파격’이라 할 만한 운용술을 보인다.
좀처럼 선발 베스트 11 근간을 흔들지 않는 벤투 감독은 그래서인지 교체 카드 운용에 인색(?)하다. 단 한 장의 교체 카드를 쓰지 않은 경기도 있었다. 지난 7월에 열린 EAFF(동아시아축구연맹) E-1 챔피언십 홍콩전(3-0승)처럼 말이다.
그만큼 벤투 감독은 소신껏 선수를 선발하고 기용하는 모습을 견지해 왔다. “국가대표팀을 독선적으로 운영한다”라는 비난에도 꿈쩍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 고집스러운 행보였다.

이강인 발탁은 그 대표적 보기다. 벤투 감독은 2021년 3월 일본과 치른 친선 A매치(0-3패)를 끝으로 이강인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올 9월, 약 1년 6개월 만에 다시 이강인을 불렀지만, 코스타리카(2-2무)-카메룬(1-0승)과 벌인 일련의 친선 A매치에 전혀 기용하지 않았다. 현장에 운집한 수많은 팬들이 애타게 “이강인!”을 연호했건만, 단 1분도 그라운드에 내보내지 않은 벤투 감독이었다.
그야말로 ‘철저한 외면’이었다. 당연히(?) 카타르 월드컵 개막을 40일 앞두고 아이슬란드(1-0승)를 상대로 치른 마지막 평가전 무대에, 이강인은 부름을 받지 못했다. 2019 폴란드 FIFA U-20 월드컵 골든볼에 빛났던 이강인으로선 치욕이라고 할 만한 배제였다.
벤투의 ‘이강인 운용’이 16강 티켓의 묘약으로 효능을 발휘했으면…
돌연, 벤투 감독은 달라졌다. 지난 12일 모습을 나타낸 카타르 월드컵 출전 최종 태극 전사 26명에, 이강인은 얼굴을 내밀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벤투 감독의 ‘깜짝 발탁’이었다.
발탁은 끝이 아니었다. 비로소 내디딘 ‘이강인 활용’의 첫걸음이었을 뿐이었다. 파격적 발탁은 중용으로 이어졌다. 벤투 감독은 24일(이하 현지 일자) 우루과이(0-0무)와 28일 가나(2-3패)와 펼친 그룹 스테이지 1~2차전에 이강인을 연거푸 승부수로 띄었다. 그리고 이강인은 ‘조커 역’을 빼어나게 소화하며 벤투 감독의 용병술을 더욱 빛나게 했다.
압권은 가나전이었다. 0-2로 뒤지던 후반 12분 권창훈을 대신해 그라운드를 밟은 이강인은 1분 만에 멋진 크로스로 조규성의 추격골(1-2)을 끌어내며 단숨에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기상천외의 패스워크를 앞세운 이강인의 활기찬 몸놀림은 한때 한국의 대역전극이 연출되는 듯싶기까지 했다.
벤투 감독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180° 바뀐 ‘이강인 운용’은 처음부터 의도한 용병술의 하나였는지 궁금하다. 이강인을 자극함으로써 잠재된 ‘축구 천재’의 재능을 끌어내려는 고육책이었을지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만일 벤투 감독이 뜻한 길들이기였다면 일단은 훌륭한 성공작으로 평가해도 될 것 같다.
벤투 감독의 ‘이강인 길들이기’를 보며 박종환 전 일화 천마(현 성남 일화) 감독의 ‘독기 키우기’가 오버랩된다. 선수 기용을 당근으로 한 박 감독의 빼어난 용병술은 일화가 한국 프로축구(K리그) 첫 3연패(1993~1995시즌)의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됐다.
선수 기용에 있어서, 박 감독은 쉽게 뜻을 표출하지 않았다. ‘오더 변경’은 박 감독의 장기였다. “상대 팀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팬들을 혼란케 하는 치졸한 술수다”라는 혹평도 많았으나, 어디까지나 규정 내에서 행해진 선수 길들이기였다. 당시엔, 경기 하루 전날 발표한 출전 선수 명단을 경기 시작 한 시간 전까지는 바꿔서 다시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선수들은 늘 자신을 채찍질할 수밖에 없었다. 예고된 출전 선수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고 해서 실망해 쉴 수도 없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박 감독의 변칙 기용술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 늘 독기를 품고 자신을 갈고닦는 데 열심일 수밖에 없었다.
이강인이 1년 6개월 동안 국가대표팀에서 외면받았을 때나 뽑히고도 경기에 나서지 못했을 때 실망 끝에 포기의 길을 걸었더라면 그 끝이 어땠을지 쉽게 떠오른다. 오히려 자신을 추스르고 나아가 더 훈련과 경기에 몰입했기 때문에, 이번 월드컵에서 잠재했던 진가를 맘껏 분출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이강인이었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벤투 감독의 ‘이강인 운용법’은 지금까지 ‘진정한 의도’를 떠나 멋들어지게 효과를 나타냈다. 16강 진출의 사활이 걸린 조별(H) 라운드 최종 포르투갈전(12월 2일·한국 시간 3일 0시)에서, 벤투 감독과 이강인의 궁합이 다시 한번 맹위를 떨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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