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스페인 월드컵 출전에 실패한 뒤 1983년 슈퍼리그를 출범시키며 프로축구 시대를 연 우리나라는 1985년 들어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 나섰다.
그러나 시작은 좋지 못했다. 첫 경기에서 네팔에 2-0으로 승리하긴 했지만 원정경기에서 말레이시아에 0-1로 덜미를 잡힌 것. 결국 문정식 감독이 해임되고 김정남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아 김호곤 트레이너와 함께 팀을 이끌게 됐다.
사령탑 교체 후 홈 경기에서 네팔을 4-0으로 꺾은 데 이어 말레이시아를 2-0으로 제압한 한국은 예선 2라운드에서 인도네시아, 최종 라운드에서 일본을 격침하고 32년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 첫 본선 득점, 아르헨티나전
1983년 멕시코 청소년대회에서 4강에 올랐던 멤버와 함께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르 레버쿠젠에서 활약하고 있던 차범근까지 불러 만반의 준비를 했던 한국. 당시 품었던 한국 대표팀의 자신감은 2006 독일 월드컵을 통해 첫 본선에 오른 토고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분데스리가라는 명문 리그에서 득점포를 쏘아올리던 '갈색 폭격기'에 멕시코 4강 신화를 쓴 멤버까지 있었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본선에 진출한 한국의 조 편성은 최악이었다. 1978년 월드컵 우승국이었던 아르헨티나와 1982년 월드컵 우승국인 이탈리아와 같은 조가 된 것. 여기에 불가리아가 끼었다. 그야말로 죽음의 조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멕시코 시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틴 아르헨티나와 첫 본선 경기를 펼쳤다. 당시 국내에서는 식당이나 다방마다 월드컵 중계 안내문이 붙었고 승리할 경우 음식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르헨티나를 상대하기에 한국의 전력은 너무나 약했다.
결국 한국은 거친 파울로 마라도나를 막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발다노에게 2골을 내주고 루게리에게 골을 내주며 0-3까지 끌려가며 32년 전 첫 출전서 겪은 대패의 아픔이 재현되는 듯했다. 하지만 후반 28분 박창선이 아르헨티나 진영 오른쪽에서 25m짜리 중거리 슈팅으로 한국의 첫 월드컵 득점을 기록했고 더 이상 실점하지 않으며 1-3으로 패했다.
▲ 첫 본선 승점, 불가리아전
비록 아르헨티나에게 패했지만 첫 골을 넣었다는 자신감에 불가리아를 꺾고 16강에 오르겠다는 각오에 불탔다.
비가 내리는 날씨 속에 불가리아와 수중전을 펼쳤던 한국은 골키퍼 오연교의 펀칭 실수로 전반 11분 게토프에게 선취골을 허용하며 끌려갔으나 후반 26분 조광래의 어시스트를 받은 김종부가 동점골을 터뜨리며 1-1로 만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골은 나오지 않았고 한국은 사상 첫 승점을 따내는 데 만족해야 했다.
▲ 자책골만 없었더라면, 이탈리아전
당시 24개팀이 출전해 와일드카드로 조 3위 4개팀이 16강에 오를 수 있는 규정에 따라 한국은 마지막 경기에서 최소한 비겨야만 16강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마지막 상대가 바로 20년 전 북한에게 0-1로 덜미를 잡히며 8강 진출권을 내줬던 이탈리아였다.
그래서 한국 역시 20년 전 북한의 돌풍을 재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졌던 것이 사실. 전반 17분 알토벨리에게 선제골을 내준 뒤 후반 17분 최순호의 동점골이 터졌을 때만 해도 16강이 가능한 듯 보였다.
하지만 월드컵은 32년만에 출전한 한국에게 16강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지 않았다. 후반 28분 알토벨리에게 결승골을 내준 한국은 후반 37분 조광래가 자책골(당시에는 알토벨리의 해트트릭으로 알려졌으나 나중에 정정됐음)을 기록하면서 1-3으로 뒤진 것. 후반 44분 허정무가 2-3으로 따라가는 골을 넣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만약 조광래가 자책골을 기록하지 않았고 허정무의 골로 2-2로 비겼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불가리아가 2무 1패, 승점 2에 득 2, 실 4를 기록하며 조 3위에 머물렀지만 16강에 진출한 것을 고려한다면 한국도 16강에 오를 수도 있었단 얘기가 된다. 이탈리아와 비겼더라면 2무 1패, 승점 2로 불가리아와 동률이 되지만 득 4, 실 6으로 다득점에서 앞서 조 3위를 차지했을 테니 말이다.
결국 한국은 3년 전 청소년 4강 신화를 썼던 그 장소에서 뼈저린 실패를 맛보고 귀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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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전서 허정무가 마라도나에게 파울을 범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