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도루를 무효로 만드는 기술(?), 투수보크
OSEN 기자
발행 2006.08.10 14: 30

도루를 시도한 주자가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도루기록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는 모두 3가지다.
첫 번째는 도루를 시도한 주자가 야수가 태그하다 공을 놓치거나, 포수의 송구를 잡지 못하는 바람에 아웃되지 않고 목표로 했던 루에서 살았을 경우로, 도루로 기록되지 않고 도루실패로 기록된다.
두 번째는 점수차가 많이 벌어진 상황에서 상대팀의 무관심속에 다음 루로 진루한 주자에게 적용되는 무관심도루(진루)다.
이 두 가지 경우외에 주자가 도루를 시도한 루에서 아웃되지 않고 살았음에도, 도루기록이 원천 무효화 되는 또 하나의 경우가 있다. 지난 8월 6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SK와 롯데의 경기에서 실제로 볼 수 있었다.
박기혁(롯데)이 SK의 채병룡 투수 때문에 사실상 성공한 것으로 보였던 2루도루가 기록상 무효로 처리된 일로, 이는 흔치 않은 일이다.
4회초, 1루주자였던 박기혁은 2사 후, 2루도루를 감행했다. 그런데 주자가 반 이상을 뛰어가도록 채병룡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동료들의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깜짝 놀란 채병룡이 뒤늦은 견제를 위해 2루쪽으로 돌다, 다리가 꼬여 중심을 잃으면서 공은 던져보지도 못하고 투수보크를 저지른 일이였다.
투수에게 보크가 선언되면서 박기혁이 어정쩡한 상태로 2루에 걸어 들어가자, 박기혁의 2루 진루기록 처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증을 표시해 왔다. 도루인지 보크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도루와 보크 두 가지 모두 다 기록되는 지….
상대팀인 SK의 최태원 코치도 이닝이 끝나고 3루 코처스박스로 이동하며 주심에게 기록이 어떻게 되는 지에 관심을 보였고, 해당 팀인 롯데에서도 당연히 박기혁의 도루인정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기록실을 찾아왔다.
“박기혁 도루 인정됩니까?”“인정이 안됩니다.”
그러면 박기혁이 스타트도 빨랐고, 투수나 포수가 공은 아예 던져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공식기록원이 박기혁의 도루기록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왜일까? 이 문제의 해법은 도루라는 기록용어의 뜻풀이에서 출발한다.
도루는 영어로 스틸(steal)이다. 스틸은 간단하게 말해 ‘훔친다’라는 뜻이다. 반면 투수보크는 안전진루권이다. 안전진루권은 4사구나 홈런 또는 투수보크 때처럼 주자가 아웃될 염려 없이 진루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런데 도루는 안전진루권이 아니다. 아웃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루하려는 행위다. 따라서 도루를 시도한 주자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크가 선언되었다면, 그 주자는 도루를 시도하는 주자가 아니라 보크로 아웃 될 염려 없이 다음 루에 대한 안전진루권이 부여된 주자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이것이 주자 박기혁의 도루를 기록상 인정하지 않은 이유다.
이날 상황만 놓고 볼 때, 주자의 처지에서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 법규나 야구규칙은 원칙이라는 커다란 틀로 짜여져 있다. 물이 새듯, 원칙에서 삐져 나오는 다소 모순이라고 느껴지는 일들이 가끔은 일어나지만, 특수한 사정이나 처지를 하나하나 일일이 반명하다 보면 오히려 원칙이 흔들릴 수도 있다.
야구는 스포츠다. 스포츠는 기록을 갖기 마련이고, 그 기록들은 큰 틀의 원칙 안에서 만들어진다. 때론 뛰어난 경기력을 보이고도 기록적으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선수가 있는 반면, 별로 한 일 없어 보이는 선수가 기록적으로 커다란 월척을 챙겨가기도 한다. 불평등해 보이고 때론 정의롭지 못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일들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며, 재미있는 얘기꺼리에 그치고 마는 것도 바로 스포츠 기록규칙의 대원칙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불안하기는 하다. 혹시나 상대팀 경쟁 주자가 도루를 시도했을 때, 그 도루기록을 무산시키기 위해 악의적으로 투수가 일부러 보크를 저지를까봐….
정말로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선의의 피해자를 막기위한 조치의 필요성이 대두되겠지만, 일견 그러한 규칙의 허점을 교묘히 파고들 정도의 궁리를 할 수 있는 투수라면 비난은 하면서도, 한편으론 규칙에 관해 깊이 연구해 낸 그의 잔머리에 놀라움도 함께 느낄 것 같다.
한편 박기혁은 이날 보크외에 또 하나의 인정받을 수 없는 도루를 보여줬다. 팀이 4-9로 뒤지고 있던 9회초 2사 1, 2루 상황, 볼카운트 2-1에서 2루주자였던 박기혁이 3루로 경보하듯 스르륵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무관심도루(진루)였다.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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