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이종욱, '훔치기에도 예의가 있다'
OSEN 기자
발행 2006.09.18 09: 46

올해는 예년과 달리 대다수의 개인타이틀 부문에서 선두경쟁이 아주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류현진(한화)의 방어율과 탈삼진, 오승환(삼성)의 세이브, 홀드의 권오준(삼성), 박한이(삼성)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득점부문 정도를 제외하면 선두와 2위그룹의 기록차가 별로 없어 각 부문의 그 최종 승자가 과연 누가 될 지, 예측하기가 아주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현재 각 부문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선수들의 면면도 새로운 얼굴들이 많아, 몸으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스포츠에서 사람이라면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명제인 ‘세대교체’ 라는 커다란 물살이 우리 프로야구 판에도 어느새 깊숙이 밀려 들어왔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요즘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도루부문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이종욱(두산)의 부상(浮上)은 일반 야구팬들이나 관계자들의 활약 기대치에 대한 당초의 예상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기에 매우 놀라울 만한 결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올해 처음으로 1군무대에 선을 보인 이종욱은 이미 2003년에 프로에 입단(현대), 그 후 상무를 거쳤지만 제대와 함께 방출되었고, 지난 겨울에 입단테스트를 거쳐 어렵사리 두산 유니폼을 입게 된, 나름의 가슴앓이를 가지고 있는 선수다. 그런 그가 시즌 초반 빠른 발을 이용한 기습번트를 몇 차례 보기 좋게 성공시키며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을 팬들에게 알리기 시작했고, 이후 주루플레이와 수비는 물론 공격에서도 빠른 적응력을 보여 시즌 후반에는 급기야 두산의 톱타자 자리에까지 올랐다. 물론 숨겨진 그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대단히 놀랄만한 일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난 8월 25일, 이종욱은 또한번 우리가 그에 대해 잔잔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던져 주었다. 잠실에서 열린 LG와의 경기에서 팀이 6-0으로 앞서 있던 6회말. 1사 후 중전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가 있던 이종욱에겐 도루를 시도해 볼만한 절호의 기회였다. 점수차나 아웃카운트를 고려할 때, 아웃에 대한 걱정없이 마음놓고 주루플레이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종욱의 도루성공률은 당시 95%에(37번 시도에 35번 성공) 육박할 정도였다. 더욱이 이종욱으로선 도루부문 경쟁자인 정근우(SK)가 단 1개 차이(35-34개)로 턱밑까지 바짝 쫓아와 있던 상태였다 (경기수에선 이종욱이 SK 정근우보다 몇 경기를 덜 치른 상태여서 여유를 가질 수는 있었다) . 또한 LG와의 잠실 3연전 바로 앞서 가진 SK와의 주중 문학 3연전에서 정근우는 이종욱이 보는 앞에서 한 경기에 도루를 3개나 성공시키는 등 최근 그 기세가 오를대로 올라있음을 이미 보여준 터였다. 그러나 이종욱은 리드를 크게 하지 않았고, 2번 강동우와 3번 안경현이 각각 8구와 6구째까지 가는 긴 실랑이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도루를 위한 몸짓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 후 후속타자들은 외야플라이와 삼진으로 물러났고, 두산의 6회말 공격은 그렇게 끝이 났다. 혹시나 뛰어도 점수차가 벌어져 있어 무관심도루로 기록될까봐 지레 포기한 것일까? 그러나 당시 상황은 무관심도루로 간주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수비측도 어느 정도 주자에 대한 견제를 하고 있는 상태였고 점수차가 6점이기는 하지만, 아직 상대팀의 공격이 3번이나 더 남아있는 상황에서 경기가 완전한 안정권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하기엔 너무 일렀다. 당연히 뛰어서 살면 도루로 기록되는 상황이었다.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 자기의 의지대로 도루를 감행할 수 있는 ‘그린라이트(green light)’라는 권한을 부여받고 있는 이종욱에게 벤치에서 크게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뛰지 말라는 사인을 따로 내보냈는 지, 굳이 확인해 보진 않았다. 이유야 어찌됐든 도루시도의 정당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하에서는 뛰지 않기로 한 그의 결정은, 개인 타이틀에 집착해 볼썽 사나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과거의 몇몇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신선한 느낌마저 들었다. 시즌이 끝난 시점에 가서, 사실상 데뷔 첫 해이기도 한 올해, 도루왕을 향한 유리한 고지를 선점중인 이종욱이 끝내 타이틀을 손에 거머쥐게 될지 아직 확언할 순 없다. 도루왕 등극과 상관없이 ‘아름다운 승부사’ 라는 유효기간이 따로 없는 이미지 타이틀만은 당분간 그의 차지가 될 듯 싶다.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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