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이닝 120 ⅔, 1승 2패 1세이브 7홀드. 중간계투 전담의 어느 투수가 낸 성적이다. 올 시즌 성적일까? 아니다. 숫자만 놓고 본다면 한해 동안 거둔 성적으로 예단할 만한 기록이지만 위에서 말한 성적은 한 시즌의 성적이 아니라, 어느 투수가 9년간 총 223경기에 중간 계투로 출장해 거둔 성적을 전부 합산한 기록이다. 올해 투수 중 가장 많은 투구이닝을 기록한 리오스(두산)의 투구이닝은 233이닝이다. 9년간 던진 통산 투구이닝이 리오스의 1년치 투구이닝의 절반을 겨우 넘고 있다. 단순히 숫자 통계만 놓고 볼 때 9년간 별로 팀에 공헌한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중간계투는 단지 투구이닝의 많고 적음이나, ‘통산 몇 승’이라는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자리다. 한두 명의 타자만을 상대하고 내려가는 단기적 임무의 특성상, 아웃카운트를 한 개도 잡지 못하고 내려갈 때도 많다. 그런 날의 투구이닝은 ‘0’ 이다. 그저 출장경기수만 늘어날 뿐이다. 승리투수가 되는 길은 더욱 요원하다. 중간계투가 승리투수가 되려면 자기가 그 이닝을 마무리 짓고 바로 이어진 자기 팀의 공격에서 결승점을 빼야 하는데, 설령 결승점에 해당되는 점수를 올렸다 하더라도 뒤에 나오는 투수가 자신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월등히 많은 투구이닝을 기록했을 경우, 승리투수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잠깐 나와 던진다고 경기 중에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경기 도중, 언제 등판하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일단 불펜에 나가 몸을 풀어두어야 한다. 경기에 나가 던지는 투구수보다 불펜에서 연습구로 던지는 투구수가 훨씬 많다. 몸을 풀기만 하고 마운드에 오르지도 못하는 날은 부지기수다. 4일간의 휴식이 주어지는 선발에 비해 딱히 정해진 휴식일도 없이 던지다보니 출장경기수가 일반 야수 못지 않게 많다. 올 시즌 SK의 좌완 릴리프 정우람은 무려 82경기(팀126경기)에 출장했는데 그가 던진 투구이닝은 불과 46이닝을 약간 넘는 정도다. (투수부문 시즌 최다 출장 기록은 2004년 LG 류택현의 85경기다) 홀드라는 새로운 분야의 기록을 만들어 정규 기록 시상부문에 넣은 것도, 이처럼 노력에 비해 빛이 나지 않는 중간계투 투수들을 좀더 부각시키고, 그들의 숨은 노력에 대한 연구와 보상이 필요하다는 시대적인 이유에서다. 한편 앞서 기록을 예로 들었던 해당 투수는 과연 누구일까? 바로 현대의 좌완 릴리프 김민범(33)이다. 1992년 지금 현대의 전신인 태평양에 입단, 1994년 5월 데뷔전을 치른 이후, 김민범은 선발로 나온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프로 첫 승이자 아직까지 마지막 승리로 남아 있는 2000년에 거둔 1승을 생애 가장 기쁜 순간으로 기억한다는 김민범, 매년 그의 목표는 한결 같다. 통산 2승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 김민범의 소원을 알고부터 그가 불펜에 등장하면 과연 등판으로 이어질 수 있을 지, 등판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어떤 기록을 들고 내려갈 지,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야구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숨은 구실을 하는 선수들이 많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크고 작은 숨겨진 기록들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다. 개인기록에 신경쓰기보다 오로지 팀 승리에 밑거름이 되는 것만을 생각하는, 스포트라이트에서 소외된 선수들의 기록에 좀더 관심을 가져보기를 권하고 싶다. 필자는 운좋게도 올 시즌 송진우(한화)의 개인 통산 200승째 경기를 직접 기록하는 행운을 맛볼 수 있었다. 송진우가 200승에 도달하기 전,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그가 언제 200승에 도달할 수 있을 지에 모아졌던 것처럼 양적인 기록상 200승 : 2승이라는 도저히 비교대상이 될 수는 없는 수치지만 김민범의 개인 통산 2승 달성이 언제가 될 지에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도 꽤나 흥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김민범 뿐만 아니라 팀을 위해 묵묵히 빛이 나지 않는 자리를 지켜가고 있는 중간계투 투수들에 대한 팬들의 보다 큰 성원과 관심은, 기록과 통계로 채워지지 않는 그들의 빈곳을 메워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현대 유니콘스 김민범의 투구 모습.(제공=현대 유니콘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