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 시즌이 끝난 후, 기록위원회가 규칙에 있으면서도 사실상 사문화(死文化) 되어 있던 무관심도루(정확한 표현은 무관심 진루)를 실제 경기에서 적용하겠다고 발표하자, 발빠른 선수들의 관심은 실로 대단했다.
시즌 개인기록에서 도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선수일수록 도루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02시즌을 앞두고 경기도 원당의 현대 유니콘스 마무리 훈련장을 찾아 가진 설명회에서 무관심도루 적용에 대해 가장 많은 질문을 쏟아낸 선수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도(大盜)’ 전준호였다. 그러나 정작 무관심도루 적용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 근심반 걱정반에 빠진 사람은 공식기록원이었다.
경기장에서 안 그래도 판정에 따른 분쟁에 가끔 당면하고 있는데, 논란거리 하나를 추가한다는 것이 영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관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별하며, 그 적용 기준이 무엇인지….”
2002년부터 무관심도루를 적용한다는 원칙만 세워놓은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터져 나오는 선수들의 질문은 하나하나가 숙제로 다가왔다. 덧붙여 박찬호로 인해 관심이 높아질대로 높아진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간혹 들려오는 무관심도루 적용기사는 이젠 더 이상 남의 집 일만으로 여길 수 없다는 시대적 압박을 주고 있었다.
또한 간혹 일방적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도 개인 기록만을 생각해 도루를 시도하는 행위가 일어나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빈볼과 양팀 선수들 간의 집단 몸싸움까지 벌어지게 되는 불상사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라도 엄밀한 규칙 적용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무르익어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2002년, 무관심도루 적용 첫해에 시범케이스로 걸려든 것은 묘하게도 도루와는 영 거리가 먼 홈런왕 이승엽(삼성)이었다. 5월19일, 한화와의 대전경기서 이승엽은 7-1로 앞서 있던 7회초에 선두타자로 나와 중전안타를 치고 출루한 뒤, 다음 타자인 마해영 타석 때 볼카운트 1-1에서 2루로 뛰었는데, 당시 공식기록원이 이를 무관심도루로 판단했던 것이다. (지금은 이 정도의 점수차와 이닝이라면 무관심도루의 적용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다)
당시 이승엽은 당연히 도루로 알고 있다가,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무관심도루가 적용되었다는 말에 짤막한 한마디 말을 남겼다.
“어차피 도루왕 할 것도 아니고…….”
적용 첫 해에 나온 무관심도루는 그 사례가 처음이자 전부였다. 아직 무관심도루 적용에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기록원들의 고민과 선수들의 알아서 안뛰기가 서로 얽혀 그 수가 현저히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2003년 이후에는 평균적으로 매년 30~40회의 무관심도루가 기록됐다. 적용에 따른 분쟁도 해가 갈수록 줄어드는 양상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무관심도루 적용규정은 좀더 구체화 되었고, 선수들의 경기 마인드도 리드 당하고 있다면 몰라도 크게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도루하지 않는 등, 불문율에 충실해지고 있다.
지금의 무관심도루 적용기준에서 기록원의 주관이 끼어들 수 없는 대표적 규정 두 가지를 들어보면,
1. 아무리 점수차가 많이 벌어진 상황이라도 볼카운트 2-3에서 포스상태의 주자(땅볼타구가 나오면 무조건 다음 루로 뛰어야 하는 주자)가 다음 루로 뛰는 행위는 무관심도루에 해당되지 않는다.
2. 3점차 이내의 상황에서 다음 루로 뛰는 것은 이닝과 모양새에 관계없이 무관심도루로 기록하지 않는다.
위 두 가지 경우 외에는 경기상황이나 수비수들의 움직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무관심도루 적용여부를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가끔은 무관심도루로 기록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고민을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 되도록 선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록원이 확신하는 상황에서만 무관심도루가 적용된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시행초기에는 말도 많았고 탈도 붙었던 무관심도루가 이제 정착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승부 뒤에 자리한 경기 매너에 있어서도 그만큼 세련미를 더해 가고 있다는 얘기다.
올 시즌 무관심도루 적용사례를 뒤적거리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희생번트 빈도수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현대의 올 시즌 무관심도루 기록이 전 구단 통틀어 유일하게 제로라는 점이다.
사연을 알아보니 속칭 완전히 맛이 간(?) 경기에서 뛰면 고참한테 무척 혼이 난다던가….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