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시즌에 현대는 153개의 희생번트를 기록해 프로야구 출범이래 단일시즌 팀 최다 희생번트라는 신기록을 만들어냈다.
비단 현대뿐만 아니라 KIA, 두산, 롯데 등 많은 팀들이 2000년 이후 가장 많은 희생번트를 기록했으며, 그 영향으로 8개 팀의 희생번트 합계에서도 사상처음 800개 돌파(806)라는 경이적인(?) 기록이 작성된 한 해이기도 했다. 경기수는 오히려 126경기로 줄어든 마당에….
희생번트 수의 절대적인 증가는 사실 팬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째째한 야구, 재미없는 야구의 주범으로 늘 궁지에 몰리고 있는 희생번트 수가 과거에 비해 급격한 증가세를 보인 이유는, 근래 들어 유행어처럼 되어버린 ‘스몰볼’이라는 야구 형태가 국내 거의 모든 구단의 공통된 현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희생번트 빈도수의 증가에는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 말고도 또 하나의 작은 원인이 숨어있다. 그것은 바로 희생번트를 판정하는 기록원들의 판정기준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기록에 있어서 ‘희생번트’라는 것은 타자가 번트를 댔다고 해서 모두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자를 진루시키고 자신은 죽어도 좋다는 희생의도가 전제 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희생번트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런 대 전제아래 타자자신도 살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번트행위(기습번트 형태)에 대해서는 과거 일체 희생번트로 기록하지 않았다. 타자의 처지에서 희생번트로 기록되지 않으면 타율을 까먹는 것은 당연, 이렇듯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희생번트 인정여부를 놓고 선수 또는 타격코치와의 언쟁이나 실랑이를 피할 수 없었다.
팀의 작전 확인이나 사전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타자의 번트 동작만을 보고 기습인지 희생인지를 가려내야 했으니, 때에 따라서는 그야말로 ‘장님 문고리 잡는 격’인 경우도 허다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최근 7년만에 친정 팀 LG로 다시 복귀한 김용달 코치가 과거 LG에 몸담고 있던 시절인 1990년대 후반으로 잠시 돌아가 본다.
LG의 톱타자는 ‘꾀돌이’ 유지현. 그런데 유지현의 번트를 기습성으로 판단한 공식기록원들이 그의 번트를 희생번트로 인정하지 않는 일이 반복해 발생하자, 아군 선수의 불이익에 대해 타격코치로서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김용달 코치의 어필 수위도 상당히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이에 기록위원회는 8개구단 모든 기록원들의 모임인 기록합동세미나에 김용달 코치의 참석을 요청했고, 김 코치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김용달 코치는 준비해온 자료를 근거로 공식기록원에게 희생번트를 ‘왜 타자의 모습만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명했고, 그에 따른 선수의 버릇이나 기타 번트수비에 관련된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이후 기록위원회는 이 문제에 대해 긴시간을 두고 면밀히 검토를 했고, 2003시즌이 시작되기 전, 선수의 번트 행위만을 가지고 희생번트를 가리지 말고, 경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희생번트 여부를 판단하라는 지침을 내리게 되었다.
이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희생번트의 판단 기준이 뿌리에서부터 송두리째 뒤바뀌게 되는, 기록분야에 있어선 일종의 ‘작은 혁명’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이러한 영향 때문이었을까. 2002년 전 구단의 희생번트 합계가 536개에 불과하던 것이 2003년엔 755개로 200개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 했고, 이후에는 평균 700개가 넘는 희생번트가 매 시즌 기록되고 있다. 희생번트 판정에 따른 분쟁이 대폭 줄어든 것은 일종의 보너스.
물론 앞서 말한 규정의 변화가 희생번트 빈도수 증가의 주요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뀐 규정이 작전구상이나 선수들의 플레이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에 따라 희생번트 수의 상대적 증가라는 부수적인 현상이 뒤따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 희생번트 수의 절대적 증가가 곧 프로야구의 질적 저하라는 단정만큼은 무리다.
김용달 코치의 조언이나 주장은 기록분야에 있어서도 작전이나 선수들의 플레이적인 진보가 반영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써, 희생번트에 관한 기술적인 얘기가 주였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희생번트라는 단어에 자칫 묶이기 쉬운 사고의 틀을 깨주었다는 데에 커다란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
희생번트. 더 없이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면서도 시대를 잘못 만나 악역의 대명사처럼 홀대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기술적으로 발전한 희생번트가 보여주는 또 다른 세계에까지 눈감아버리는 일 만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이다.
KBO 기록위원회 1군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