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기록과 기록 사이]지명타자 규칙, 함정을 조심하라
OSEN 기자
발행 2007.02.01 09: 27

한국 프로야구는 프로 출범(1982) 때부터 지명타자 제도를 줄곧 유지해오고 있다. 지명타자 제도는 1973년 아메리칸 리그에서 한시적으로 시험운영 해보기로 하고 시작된 것이 그 단초로, 공식적으로 아메리칸 리그가 지명타자 제도를 채택(내셔널리그는 반대)하게 된 것은 1975년이다. 야구사에 지명타자로서 그 첫 번째 족적을 남긴 것은 론 브롬버그(뉴욕 양키스)라는 선수로 1973년 4월6일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볼넷으로 출루한 것이 최초의 지명타자 기록으로 남아있다. 공교롭게도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지명타자 기록 역시 내용이 같은데, 1982년 삼성과 MBC의 개막전에서 삼성의 지명타자 김한근이 2회초에 볼넷으로 출루한 바 있다. 지명타자 제도를 채택하는 이유는 타격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는 투수를 빼고, 타선의 공격력을 강화함으로써 보다 더 호쾌한 야구를 선보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지명타자 제도의 실시로 인해 체력과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수비를 하지 않아도 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선수수명이 길어졌다는 점, 그리고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지 않게 됨으로써 투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됨과 더불어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부상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들은 이 제도가 만들어낸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팬들의 꾸준한 지적을 받고 있는 수비를 못하는 반쪽 짜리 선수의 양산과 타석에 서지않아도 되는 투수들의 생각없는 빈볼 투구 등은 지명타자 제도의 그늘인 셈이다. 그런데 이 지명타자에 관한 규칙 중, 자칫하다간 무심코 빠지기 쉬운 함정이 하나 숨어 있다. 야구규칙 6.10에 나와 있는 것으로 ‘경기 전 제출된 타순표에 지명타자로 일단 이름이 오른 선수는 상대팀 선발투수가 교체되지 않는 한, 그 투수에 대해 적어도 한번은 타격을 끝내야 한다’라는 조항이다. 이러한 규칙이 만들어진 이유는 지명타자 자리에 출장예정에 없는 선수의 이름을 올려놓고 나중에 상대팀의 투수기용에 따라 다른 타자로 바꿔치는 비신사적 행위을 막기 위해서다. 이와 같은 취지를 가진 규칙이 때론 함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얘기는 상황이 벌어지는 시기가 1, 2회의 이른 시점이라는 것, 그리고 상식적인 경기운영에 익숙한 베테랑들일수록 그냥 넘어가기 쉽다는 시기적,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계를 다룰 때 공회전이라는 것이 있듯이 사람의 두뇌도 경기에 몰입하게 되기 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데 이 규칙은 그런 틈을 주지 않는다. 또한 경기개시 초반에 투수가 강판 당하거나 공격만을 위해 타순에 올렸던 지명타자를 첫 타석부터 제외시키는 경우는 드문 일이라는 점에서, 상식적 경기가 주는 타성이 어느 정도 몸에 배어있기 마련인 경력자일수록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은 오히려 더 크다고 하겠다. 몇 년 전에는 기록원이 이 규칙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나머지, 경기가 지연되고 상대팀 감독까지 무슨 일인가 하고 확인 차 그라운드로 나오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2001년 4월 20일, LG와 해태의 경기(잠실)에서 해태의 선발투수 좌완 오철민이 1회말에 4명의 타자를 상대하며 단 하나의 아웃카운트도 잡아내지 못하는 난조(2안타 2볼넷)를 보이자, 김성한 감독은 곧바로 우완 유동훈을 마운드에 올리는 발빠른 투수교체를 단행했다. LG는 계속된 1사 만루의 기회에서 7번타순에 올라 있던 지명타자 안재만을 빼고 왼손 대타 서용빈을 기용했는데, 여기에서 일이 꼬였다. 기록실에서는 지명타자로 올라있는 안재만이 무조건 한 타석을 완료해야 한다는 사실에만 집착, 대타기용을 인정하지 않았고, 기록원의 다급한 통보에 얼떨결에 대타 불가(?)라는 사실을 LG측에 알리러 주심이 간 사이, 그제서야 기록원이 상대 선발투수가 이미 바뀐 상태이기 때문에 지명타자 타순이지만 대타기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 없었던 일로 하고 그대로 경기를 진행시킨 일이다. 기록원의 착각이 부른 이 작은 소동 때문에 경기가 잠시 중단되고, 해태의 김성한 감독이 주심에게 다가와 사실확인을 하는 등, 일어나지 않아도 될 해프닝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바로 이 규칙이 심판원이나 기록원들에게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 민감한 규칙인지를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하지만 지나서 보면 당시 벌어진 작은 소동이 결코 나쁘게만 해석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러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그냥 넘어가는 것보다는 백번 낫기 때문이다. 해프닝이 아닌 사건으로 커져버리면 그 때는 감당키 힘든 상황으로 번지게 된다. 한편 이 규칙(6.10)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가보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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