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다 꿰어 맞출 수 있다는, 작지만 완벽함(?)을 자랑하는 야구규칙이지만, 유독 지명타자 관련 규칙에서는 허점을 드러내는 구석이 하나 존재한다. 지난번에도 다루었듯이 지명타자 규칙 내에는, ‘지명타자는 상대 선발투수가 바뀌지 않는 한, 적어도 한번은 타격(출루 또는 아웃)을 끝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들어있다. 그런데 지명타자가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 등으로 정상적인 플레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경우, 이를 다른 선수로 교체할 수 있다는 조항이 그 어디를 뒤져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잔인한(?) 사실 때문에 간혹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1992년 8월, 광주에서 열린 해태와 빙그레의 경기에서는 바로 앞서 말한 지명타자 규칙의 의무조항 때문에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진 일이 있다. 경기개시 전, 해태가 제출한 타순표에 지명타자(6번)로 이름이 올라있던 박철우가 경기를 앞두고 연습도중 턱에 공을 맞아 부상을 당한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부상을 당하면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는 것이 당연한 일의 순서이겠지만 문제는 하필이면 박철우가 반드시 한 타석을 완료해야 하는 지명타자로 타순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심판원이 불가피한 상황임을 들어 지명타자의 교체를 양해해 줄 것을 상대팀인 빙그레 측에 요청했지만, 당시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은 규칙집에 지명타자는 부상 때 교체할 수 있다는 조항이 없다는 점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박철우는 부상 후에도 30분 이상을 기다린 끝에 1회말 타석에 등장, 삼진을 당해준(?) 뒤에야 구장밖에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로 병원에 갈 수 있었다. (이 일을 놓고 다음날 신문은 프로세계의 비정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고 다룬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1990년대 중반 태평양과 현대에서 활약(1994~1997)했던 하득인도 지명타자로 나섰다가 스윙도중 배트를 잡은 상태에서 투구에 손을 맞아 피가 날 정도의 부상을 당했지만, 그날 경기의 첫 타석이라는 이유로 상대팀에서 교체를 허락해주지 않아 피가 배어난 붕대를 감고 한참 후 다시 나와 한 타석을 완료해야만 했던 적이 있다. 대개 규칙에 명확히 명시가 되어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주심에게 상당부분 재량권이 주어져 있긴 하지만 상대가 규칙집을 들고 나와 규칙위반이라고 하는데야 주심으로서도 마땅히 설명할 부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투수 쪽에는 바로 이런 상황에 대비한 규칙이 따로 명시가 되어 있다. 선발투수는 일단 등판하면 무조건 상대팀 타자 한 명을 상대한 후라야 그 경기에서 물러날 수 있지만(구원투수의 경우는 예외), 만일 투수의 부상이 도저히 경기를 치를 수 없는 상태라고 주심이 판단한 경우에는 그 선발투수의 교체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구를 지명타자 조항에도 처음부터 똑같이 끼워 넣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불행하게도 아직까지도 이 문구는 투수 쪽에만 붙어있는 상태다. 만일 또다시 지명타자가 첫 타석에서 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상대가 예전처럼 냉정하게 규칙을 들어 교체를 거절한다면…, 역시 방법은 없다. 하지만 사정은 해볼 수 있는 근거(전례)는 있다. 해태에서 LG로 이적해 두 번째 시즌을 맞던 1995년, 한대화는 지명타자로 나와 비슷한 경험을 겪게 된다. 그 해 6월 23일 잠실에서 열린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4번 지명타자로 출전한 한대화는 첫 타석에서 자기가 친 파울타구에 왼쪽 다리를 맞아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다가 치료를 받고 간신히 타석에 들어섰는데, 연이어 같은 부위에 파울타구를 재차 맞고는 그대로 그라운드에 누워버린 일이다. 누가 봐도 더 이상은 타격이 힘들어 보이는 형국. 그냥 서있을 수만 있어도 어떻게 해보겠지만, 한대화는 타석에 서 있을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규칙대로라면 지명타자인 한대화는 아직 한 타석을 완료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선수로의 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주심은 쌍방울의 김우열 감독대행에게 양해를 구했고, 쌍방울 측에서 이를 받아들여 LG는 최훈재로 대타를 기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식기록원은 이 사실을 ‘부득이한 경우의 투수교체 가능조항’을 원용(援用)해 선수의 교체를 인정했다는 설명을 관중에게 알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필자는 얼마 전, 야구규칙 5.10의 인명중시 조항(선수의 안전 최우선)에 대해 거론한 적이 있다. 지명타자 규칙 역시, 비록 비상시 선수교대 가능조항이 없다 하더라도 납득할 만한 상황에서 상대가 양해를 구해 올 경우, 이를 받아들여주는 쪽으로 가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다. 야구경기의 근간이 되는 규칙상 의무도 중요하겠지만, 그 어떤 것보다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은 몸이 곧 자산이라 할 있는 프로선수의 안전이기 때문이다.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