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대주자는 유령 선수(?)
OSEN 기자
발행 2007.04.02 11: 33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보자. 2007 프로야구 개막일인 4월 6일. 대전에서는 한화와 SK의 개막전 경기가 열린다. 9회에 접어들기까지 0대0의 팽팽한 접전이 계속된다. 9회말 한화는 드디어 선두타자가 출루하며 절호의 기회를 맞는다. 김인식 감독은 걸음이 느린 1루주자를 빼고 대주자 이범호를 기용한다. 그러나 2사가 되도록 1루에 그대로 묶여있어야 했던 이범호는 더 이상 타자에 의존하지 못하겠다는 듯, 도루를 감행한다. 2루에 안착한 이범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3루와 홈스틸까지 연속해서 성공시키며 팀을 승리로 이끈다. 이범호는 당연히 이날 경기의 수훈갑으로 선정되며 인터뷰 석상에 나와 상기된 얼굴로 소감을 말한다. 뜬금없이 이 무슨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인가? 지난해까지 이범호(26)는 434경기 연속출장(2003년~)을 기록하고 있다. 현역 선수중 최다 연속경기출장이다. 최태원이 보유하고 있는 1014경기 연속출장(1995~2002년)에는 한참 못 미치는 기록이지만, 무서운 장타력을 무기로 한화 중심타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붙박이 3루수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범호가 향후 연속출장 기록을 계속 이어나가(126경기 기준으로 5년이 필요) 기존 최태원의 기록을 깨뜨릴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인다. 그런데 앞서 말한 가상의 상황이 실제로 이범호에게 일어난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범호의 연속경기 출장기록은 434경기에서 중단되고 만다. 쉽게 말해 개막전에서 이범호는 경기에 출장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결승득점을 올리며 도루 3개까지 한꺼번에 성공시킨 이범호가, 수훈선수로 선정되어 인터뷰까지 한 그가 경기에 출장하지 않았다니…. 현재 연속경기 출장기록에 관한 규정(10.24)에는 한 회의 수비에 출장하거나, 타자로 나와 한 타석을 완료(아웃이나 출루)해야 기록이 이어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대주자로 출전한 것만으로는 연속기록이 이어지지 않는다. 대타로 나왔다가 상대 투수가 바뀌는 바람에 타석에 들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물러나야 하는 선수도 연속기록이 이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 대수비는 한 이닝을 완전히 책임져야 한다. 9회 1사 후 대수비로 출장했다면 이 역시 연속경기 출장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과거 최태원은 막판, 몇 경기에서 대타나 대수비로 나와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이어나간 적이 있는데, 좀처럼 출장기회를 잡지 못하던 어느 경기에서 기록이 걸려있는 최태원을 대주자로라도 기용할 생각이었다는 아찔한(?) 후일담은 위의 규정을 정확히 알지 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삼성의 대주자 전문요원인 강명구는 2005~2006년 연속으로 100경기 안팎으로 출장해 2년 연속 도루 21개를 기록, 팀내 도루 1위에 오르는 짭잘한 활약을 펼쳤는데, 연속경기 출장에 있어서는 수 십번도 더 중단된 셈이다. 대주자를 이처럼 연속기록에서 홀대하는 이유는 뭘까? 정규시즌은 그렇다 하더라도 포스트시즌 같은 큰 경기에서 경기막판 등장하는 한 명의 대주자가 승부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 구실을 하게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는 철저히 분업화 되어가는 현대야구에서 대주자를 결코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야구도 여타 구기종목이 그렇듯, 공격과 수비라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경기다. 그 때문에 공격(타석에서의 배팅) 기회와 수비 기회를 가져야만 경기에 출장한 것으로 인정하는 통념상, 대신 나와 뛴다는 의미로서의 대주자는 뭔가 함량미달로 느껴졌고, 배팅과 연결되지 않는 뜀박질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격 범주에서 한발 벗어나 있는 영역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런 규정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여기에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이어가기 위해 대주자로 뽀르르 뛰어나오는, 거저먹는 행위를 막기 위한 예방차원의 속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물론 상황이 이렇다고 대주자의 경기출장 기록 자체가 모두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연속경기 출장기록에 관한 것만 아니라면 단순 경기출장 기록인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연속경기 출장과 관련해 세계속으로 한눈을 잠시 팔아보자. 2632경기 연속출장(17시즌, 1982~1998년)으로 세계 최다기록을 세운 칼립켄 주니어(볼티모어)의 기록도 대단했지만, 작년(2006) 8월15일, 39살의 나이로 1000경기 연속 무교체 완전 풀 출장기록(현재 1042 경기 기록행진 중)을 세운 일본의 가네모토 도모야키(한신 타이거즈)의 연속기록은 실로 경외스런(?) 경지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칼립켄도 무교체 부문에서는 903경기 연속출장에 그친 바 있다) 어쨌거나 대주자는 규정상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인정받지 못하며, 마치 도깨비 감투를 쓴 ‘유령선수’ 취급의 푸대접을 받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신세지만, 1군 엔트리 안에 ‘대주자 전문요원’이라는 보직을 보란듯이 걸어놓고, 사자처럼 먹이 앞을 어슬렁거리며 때를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은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던가. 대주자들의 유일한 무기인 빠른 발이 되레 화를 부르게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1993년 삼성과 LG(잠실)의 플레이오프 2차전. 2-3으로 뒤진 LG의 9회말 마지막 공격, 무사 1루에서 기용된 1루 대주자 윤찬(LG)의 폭주(플라이아웃 타구 때 뒤도 안돌아보고 홈까지 질주) 사건. 2004년 삼성과 현대(잠실)의 한국시리즈 9차전. 5-8로 뒤진 삼성의 8회 말 공격. 무사 1, 2루에서 기용된 1루 대주자 강명구(삼성)의 앞주자 위치 파악 소홀로 인한 주루사(2루주자 신동주가 당연히 홈까지 들어가는 줄 알고 2루를 돌아 3루까지 가려다 앞차에 막혀 허무하게 아웃) 등은 지금도 당시의 아군팀들에게 있어 아주 뼈아프게 회자되어 내려오고 있는 대주자에 얽힌 일화들이다.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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