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기록으로 되새겨 본 박동희
OSEN 기자
발행 2007.05.01 11: 52

올 시즌 신인 최대어로 꼽히는 SK의 좌완투수 김광현이 데뷔전에서 4이닝 동안 8피안타 3실점이라는,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고 마운드를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신인 투수의 프로 데뷔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역대 최고의 투수로 자타가 공인하는 선동렬(당시 해태)도 1985년 삼성을 상대로 치른 데뷔전(7월2일. 대구)에서 7⅔이닝 동안 5점을 내주며 패전투수가 되는 아픔을 겪은 바 있다. 또한 당대 선동렬의 라이벌이었던 최동원(당시 롯데)도 첫 등판경기였던 삼미전(1983. 구덕구장)에서 2⅓이닝 동안 2실점하며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데뷔전을 치러야 했다. 대학야구 14타자 연속 탈삼진(1992. 성균관대전)기록을 간판으로 내세우며 LG에 입단했던 ‘야생마 이상훈’의 데뷔전(1993년. 광주 해태전) 역시 ⅔이닝 동안 2실점. 그러면 팬들의 지대한 관심속에 프로 데뷔전을 치렀던 ‘닥터 K’급 기대주들의 데뷔전은 모두 이처럼 초라했을까? 박동희(당시 롯데) 만은 그렇지 않았다. 1990년 4월 11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전에서 3-1로 리드하던 6회말 구원 등판한 박동희는 4이닝 동안 14타자를 상대로 무려 10개의 탈삼진을 솎아내며 세이브를 기록, 데뷔전을 아주 화려하게 장식했다. 하지만 데뷔전 만을 놓고 볼 때 시작부터 엄청난 활약을 펼칠 것으로 예상됐던 박동희는 그 해 10승 7패, 방어율 3.04라는 평범한 성적을 거두는 데에 그치고 만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14승 9패, 방어율 2.47이라는 생애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다승, 방어율, 승률, 그리고 탈삼진등 주요 투수부문에서 모두 10걸 안에 들었지만 여전히 롯데의 에이스는 17승 투수 윤학길의 차지였다. 그러나 1991년은 지금도 팬들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고 있는 박동희의 모습을 깊이 심어놓은 해이기도 하다. 1991년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 박동희는 2-1로 앞서던 3회말, 1사 3루 상황에서 1번타자 류중일 타석에 구원등판(0-1)하게 된다. 그런데 볼카운트 2-3에서 투구동작을 일으킨 박동희의 손에 공이 그대로 있었다. 규칙에 따라 투수보크가 선언되며 허망한 동점 허용. 이 시점에서 박동희의 강하지 못한 심장에 대한 원망이 쏟아졌지만 오히려 이후 박동희는 후세에 길이 남을 투구를 선보이게 된다. 삼성 김성길과 구원 맞대결을 펼치며 연장 13회까지 총 10⅔이닝을 끝까지 던지며 1실점(비자책)으로 호투했던 것이다. 소요시간만 4시간 37분이 걸렸던 이 경기는 비록 3-3 무승부로 끝나 재경기를 치러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박동희는 삼성의 38타자를 상대로 탈삼진 15개(이만수를 제외한 전 타순에서 탈삼진 기록)를 뺏어내는 등, 그의 선수생활 중에서 가장 강렬하고 화려하게 타올랐던 순간이었다. 1992년엔 7승에 그쳤지만 신인투수 염종석과 윤학길의 활약으로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자, 빙그레를 상대로 만난 한국시리즈에서 지친 염종석의 자리를 잘 메우며 호투, 박동희는 염원하던 팀의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MVP(2승1세이브)에까지 오르는 또 한번의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1993년 5월 13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쌍방울 전에서 4-0으로 앞선 6회까지 포수 강성우와 호흡을 맞추며 노히트노런 기록을 이어나갔지만, 경기가 운 없게도 6회강우 콜드게임으로 끝나 공식적인 노히트노런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참고기록에 머물러야 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부친 박두일 씨의 이름에서 따온 ‘21’이라는 숫자를 등번호로 택했던 박동희. 일명 ‘돌직구’라고 불리는 빠르면서도 무게가 실린 좋은 공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조금은 단조로운 구질과 제구력 부족 그리고 몸쪽 승부에 대한 자신감 결여 등으로 박동희다운 투구를 바라는 팬들을 자주 실망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잦은 부상으로 12년간 규정투구회수를 넘긴 것이 데뷔하던 해인 1990년과 이듬해인 1991년 단 두 해뿐. 그리고 1997년 2:2 맞 트레이드 형식에 따라 삼성으로 이적(박동희, 김종훈 vs 이동수, 박석진)한 후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 2000년 4월 7일 SK를 상대로 생애 마지막 완봉승(대구구장. 9탈삼진)을 거두며 잠깐 타오른 후, 2001년을 끝으로 은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1985년 모교인 부산고를 봉황대기 우승으로 이끌며 5경기에 걸쳐 34이닝 동안 방어율 ‘0’ 라는 믿기지 않는 기록을 만들어냈던 괴물투수 박동희. 제 29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1986년 네덜란드)에서 최다승을 거두며 팀을 준우승(우승 쿠바)으로 이끌었고, 1988년 춘계대학야구 예선(춘천)전에서 원광대를 상대로 노히트노런(14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아마츄어 시절 굵직굵직한 기록들을 끝없이 만들어 냈던 박동희로서는 아쉬움이 많은 프로생활이었을 것이다. 프로통산 기록은 251경기에 나와 59승 50패, 방어율 3.67, 탈삼진665개. 별로 주목할 만한 기록도 아니고 그렇다고 놀랄만한 기록도 아니다. 하지만 박동희라는 투수는 숫자로 보여지는 통계만을 가지고 재단하기엔 늘 어딘가 부족함을 느끼게 만드는 선수였다. 동화 속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가 불을 하나씩 밝힐 때마다 원하는 화려한 그림이 하나씩 그려졌듯이, 프로 선수생활 내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진 못했던 박동희지만, 가끔씩 그가 힘을 내 빛을 발할 때마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는 새로운 기록과 이야기로 채워져 나갔던 것이다. 지난 3월, 유명을 달리한 이후 알게 된, 그가 유소년 야구장 건립을 추진했었다는 가슴 찡한 뒷 얘기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커다란 아쉬움의 빈자리를 만들었다. 이제 그는 가고 없다. 그렇지만 그가 야구인생에 있어 마지막으로 밝히려 했던 어린 야구 꿈나무들을 위한 운동장 마련의 꿈이 꼭 이루어져, 그곳에서 야구놀이를 하게 될 많은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박동희가 남긴 야구의 흔적들이 아롱아롱 새겨지기를 진심으로 꿈꿔본다.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기뻐하는 박동희=롯데 자이언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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