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가 마운드에서 내려가지 않고 다른 야수의 자리로 이동하는 일은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다. 하지만 철저한 분업화와 전문성이 요구되는 프로의 세계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장면이다. 엄연히 지명타자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프로야구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난 5월 23일, 삼성과 SK의 대구경기에서 중간 계투로 올라왔던 조웅천(SK)이 투구 중, 잠시 좌익수로 이동한 것을 두고 팬으로부터 ‘재미있다’는 쪽과 ‘프로야구에는 어울리지 않는 전술이었다’는 아주 대조적인 두 가지의 반응이 흘러나왔다. 재미있고 없음을 떠나 김성근 감독의 희한한 용병술로 골머리를 앓게 된 것은 다름아닌 공식기록원들이다. 투수가 일반야수의 자리로 수비위치를 옮긴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2년 4월 10일, 사직에서 열린 롯데와 LG의 경기에서 투수 정삼흠(LG)이 잠깐동안 1루수로 옮겼다가 다시 마운드로 돌아온 일이 있다. 8회 말 동점 상황에서 장효조가 타석에 들어서자 정삼흠을 1루로 보내고 좌완 이국성을 원포인트 릴리프로 마운드에 올렸던 것이다. 주자가 타구에 맞아 아웃되는 바람에 결과는 어쨌든 성공적. 당시 LG의 수장은 이광환 감독이었다. 이번 조웅천 해프닝(?)도 맥락은 비슷하다. 8회 말 좌타자 양준혁(삼성)과 맞닥뜨리게 되자 김성근 감독은 덕아웃 기록원에게 이러한 선수기용이 문제가 없는 지를 확인한 후 좌완 가득염을 올렸고, 다시 진갑용과 심정수로 타선이 이어지자 조웅천을 마운드에 복직(?)시켰던 것이다. 의도한 대로 양준혁이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나며 SK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실점없이 이닝을 마칠 수 있었다. 이러한 돌발적인 용병술을 내보인 김성근 감독의 속뜻은 의외로 간단했다. 경기 종반임에도 동점 상황이 이어지자 연장전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남은 투수진의 운용이 마땅치 않자 좀더 조웅천을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묘수였다. 경기는 김성근 감독의 우려대로 12회 연장까지 내닫고도 1-1 무승부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이날 ‘좌익수 조웅천’ 건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우선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조웅천의 타순지정이었다. 투수가 야수로 나갈 경우, 지명타자는 소멸이 된다. 즉 투수가 타순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조웅천에 이어 마운드에 투수로 올라온 가득염도 타순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면 조웅천과 가득염 중에서 누가 지명타자의 타순에 들어가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이미 몇 년 전 룰 미팅을 통해 원칙을 정해놓은 바 있다. 조웅천이 야수로 이동하는 순간, 그는 이제 투수의 신분이 아니다. 따라서 물러난 야수의 자리로 들여보내야 하고, 새로 등판하는 투수 가득염이 기존 지명타자의 타순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이날 경기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타순이 지정(조웅천이 지명타자, 가득염이 좌익수)된 채로 경기가 진행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규칙에 어긋난 타순은 아니다. 해당 팀에서 별도의 타순지정을 통지해 온 경우에는 이처럼 반대로 타순을 구성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이날의 타순지정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한가지 부연설명을 덧붙이면 이해가 좀더 쉬울 수 있다. 만일 조웅천이 지명타자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원칙과 다르다고 해서 받아들여주지 않을 경우, 해당 팀은 후에 다른 방법을 써서 이를 관철(?)시킬 방법이 존재한다. 가득염을 먼저 투수가 아닌 좌익수로 기용하고, 다시 좌익수 가득염과 투수 조웅천을 맞바꾸는 이중과정을 거치면 조웅천을 지명타자 타순에 올릴 수 있다. 한번 통보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을 두번의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도록 한다는 것은 비생산적이며 원할한 경기진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득 될 것은 없어 보인다. 타순 문제 다음은 투수의 기록이다. 조웅천의 투구이닝은 ⅓과 1⅓ 이닝으로 나뉘지만 개인기록은 합산해서 반영하면 문제될 것이 없는데, 만일 두 번의 등판에서 모두 홀드를 기록하거나, 홀드+세이브 또는 홀드+구원승을 기록하는 경우에 이를 모두 인정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또 다른 논란거리로 다가왔다. 심하게 비약하면 한 투수가 마운드를 들락날락 거리면서 승리와 홀드, 세이브를 모두 기록하게 되는 상황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규칙과 관련된 긴 이야기는 차치하고, 투수 기록상 득이 되는 홀드, 세이브, 구원승에 대해서는 한 투수의 복수기록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비중이 큰 기록 하나만을 인정하는 쪽으로 잠정적 가닥을 잡고 있다. 반면 홀드+패전, 홀드+BS, 홀드+무승부 등의 투수에게 전혀 이로울 것이 없는 기록과 중복되는 경우엔, 홀드 기록을 그대로 살려두는 것이 낫다는 것이 중론이다. 참고로 이번 일과 관련된 규칙 한가지를 더 소개한다. 투수가 야수의 자리로 갈 수는 있지만, 그 횟수는 한 이닝에서 단 한 번만으로 제한하고 있다. 조웅천이 좌익수로 갔다면 그 이닝에서는 투수가 아닌 또 다른 자리로 수비위치를 옮기는 것은 규칙(3.03) 위반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한편 순간의 잘못된 판정이나 결정 하나가 중대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는 민감한 직업특성상 심판원이나 공식기록원들은 예상치 못한 경기상황에 직면하는 것에 대해 누구나 어느 정도 부담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을 참 좋아들 한다. 이 말은 ‘다른 산에서 나는 하찮은 돌이라도 자기의 옥(玉)을 가는 데에 소용이 된다’라는 뜻인데, 다른 경기장에서 일어난 뜻밖의 상황들은 내가 직접 난처한 일을 경험하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