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8일. 대전구장에서 열렸던 한화와 KIA의 경기는 3회초 들어 갑자기 퍼붓기 시작한 비로 인해 비록 노 게임이 되었지만, 프로야구 최초로 만루홈런이 무효가 된 어이없는 해프닝은 두고두고 이야기꺼리로 남게 되었다. 이날 비운의 주인공은 단연 이영우(34)였다. 이영우는 한화가 4-5로 뒤지고 있던 2회 말 2사 만루에서 우측 담장을 넘기는 짜릿한 만루홈런(개인통산 3번째)을 쳐냈는데 이것이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피해는 만루홈런 하나만이 아니었다. 밀어내기로 이미 올렸던 타점 1개를 포함해서 무려 5타점이 폭우에 흔적없이 떠내려가고 말았던 것이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지만, 이후 찾아 든 병역비리에 휘말린 끝에 취소, 결국 군복무를 마쳐야 했던 이영우로서는 근 3년 만(2004년 9월 이후)에 날린 복귀 후의 첫 홈런이기도 했다. 덕아웃에 앉아 비가 쏟아지는 하늘만 바라보며 내심 애를 태우던 이영우는 야속하게도 끝내 노 게임이 선언되자 “타격감이 좋아지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 앞으로의 경기에 더욱 집중하겠다”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늘이 있으면 양지도 있는 법. 한화의 선발투수였던 류현진은 그늘과 양지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류현진은 팀이 앞서고 있는 상황이라 승리투수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난조를 보이며 초반 이미 5실점이나 기록, 방어율이 한참 높아진 상태였고 이날 컨디션은 되찾은 리드를 잘 지켜낼까도 확신이 서지 않을 만큼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완연한 양지는 KIA였다. 언제나 노 게임의 최대 수혜자는 지고 있던 팀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KIA내에서도 그늘은 있었다. 세상이 온통 이영우의 취소된 만루홈런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KIA의 이현곤 역시 조용한 아쉬움을 곱씹고 있었다. 올해 들어 완전 업그레이드 된 타격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타격부문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이현곤(27)은 이날도 예리한 솜씨로 벌써 안타 2개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그만 비에 젖어버린 것이다. 2002년 프로 데뷔 후, 이렇다 할 성적을 한번도 기록하지 못했던 이현곤은 올해는 큰일을 한번 낼 기세다. 전반기 종료(7월15일) 현재 이현곤은 3할2푼6리의 고타율로 당당히 5위 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 동안 2할 8푼대 이상을 쳐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그로서는 그야말로 일취월장(日就月將)한 기록이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최다안타부분이다. 99개로 단연 1위다. 시즌 100안타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었던 그였지만 이미 전반기에 자신의 기록(2003년, 92개)을 훌쩍 넘어섰고, 이젠 모든 팀을 통틀어 가장 먼저 100안타 고지를 밟기 일보직전이다. 최다안타 부문에서 이현곤을 위협할 만한 상대는 현재 양준혁(삼성)과 크루즈(한화) 정도다. 양준혁은 95개, 크루즈는 93개로 각각 2, 3위에 올라있다. 특히 양준혁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 날이 갈수록 그 기세를 더해가는 양상이다. 급기야 지난 7월 13일 수원구장 현대전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한 경기 3개의 홈런과 6개의 안타(타이기록)를 한꺼번에 몰아치는 대폭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경기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최다안타에서 양준혁의 삼성(78경기)이 이현곤의 KIA(81경기)보다 3경기를 덜 치른 상태로 전반기를 마쳤다는 점은 이현곤의 현재 독주가 결코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주요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볼 때, 소리없이 빗물에 쓸려간 그날 이현곤의 안타 2개가 상황에 따라서는 후에 상당히 아쉬워질 지도 모를 일이다. ‘노 게임’. 야구의 정식경기 요건인 5회(홈팀이 리드하고 있을 때는 5회초까지 종료)를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비 때문에 경기가 중단된 경우를 말하는 야구용어다. 비로 인해 노 게임이 선언되어 선수들의 굵직한 기록들이 가끔씩 무효로 처리되는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노 게임’이라는 제도,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는 규칙이다. 조명이 고장난 경우, 이닝에 관계없이 일단 일시정지경기로 하고 다음에 계속해서 속개(이 제도는 이유가 있다)시키고 있는 것처럼, 우천으로 인한 중단도 나중에 이어서 경기를 마저 치르게 했다면 이영우나 이현곤의 경우처럼 속 쓰린 기억을 만들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련만…. 현대의 김동수가 내놓은, 날 궂은 날의 가장 바람직한 타격에 대한 한 마디가 생각난다. “볼넷이 가장 좋아요. 비오는 날엔. 후유증도 없고….” 노 게임은 선수들의 모든 기록들을 이처럼 무용지물로 만들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규칙이나 제도일 뿐. 그렇다고 그들이 경기가 중단되기까지 쏟아냈던 열의와 최선을 다한 플레이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정식기록으로 인정받은 것들보다도 팬들의 기억에는 더 오래 살아있을 수도 있다. 비록 숫자로 나타나진 않지만, 노 게임 역시 선수들이 걸어온 엄연한 프로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이기 때문이다.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