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기록원을 애먹이는 양준혁의 전력질주
OSEN 기자
발행 2007.08.07 15: 26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로서, 사회 각 분야에서 나름의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을 일컬을 때 자주 인용되곤 하는 싯귀다. 현재 한국프로야구 타격부문에 있어 거의 독보적이다시피 새로운 역사를 연일 써 내려가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38)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를 오늘에 있게 한 8할은 무엇일까’ 라는 다소 진부하지만, 그러면서도 반드시 챙기고 넘어가야 할 것만 같은 궁금증이 스멀스멀 밀려든다. 웬만한 선수라면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 마흔이 내일 모레.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에 뛰어든 것도 아니고, 영남대를 졸업하고 상무까지 거치고 난 후인 1993년에서야 프로에 첫 발을 내디딘 그다. 통산기록 작성에 있어선 결코 유리할 것 없는 늦은 데뷔. 그러면 내로라하는 다른 스타급 선수들보다 기량이 월등했기 때문이었을까? 꼭 그런 것 만도 아니다. 프로생활 15년 동안 타격 주요 3개 부문(타율, 홈런, 타점) 수상내역은 타격상 4회(1993,1996,1998,2001), 타점상 1회(1994)가 전부다. 그러나 범위를 넓혀 득점, 최다안타, 장타율, 출루율, 루타수, 도루, 볼넷 등의 그 해 10걸을 살펴보면 양준혁이라는 이름이 도처에 고루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한 부문에서 특출나진 않지만 오랜 기간 전 부문에 걸친 꾸준한 활약이 뒷받침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꾸준하다는 사실 뒤에는 오늘날의 양준혁을 만든 본질이 숨어있었다. 바로 성실과 매 순간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세다. 지난 7월 26일 양준혁은 두산과의 잠실경기에서 개인통산 2000안타 달성(6월9일)에 이어 15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라는 또 하나의 기념비적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 기록의 완성은 화려한 장타나 홈런도,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일반적 안타도 아닌 전력질주 끝에 얻어낸 내야안타였다. 8회 초 유격수 왼쪽 약간 깊은 타구였는데, 유격수의 원 바운드 송구와 동시에 1루에 들어갔고 결과는 세이프. 15년 연속 100안타 이상을 기록하게 되는 순간이었는데, 또 하나의 기록달성이라는 겉포장 보다도 지금의 양준혁을 가능케 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여실히 확인시켜 준 순간이었다는 점에서 그 어떤 호사스런 유형의 안타보다도 값진 그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전에 이미 너무나도 굵지굵직한 기록들을 많이 세워서였을까? 15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하고 대주자와 교대되어 덕아웃으로 들어서는 그에게 축하의 손짓을 하는 사람은 겨우 두어명. 아마도 홈경기가 아니어서 기록달성에 대한 내막을 아는 선수가 별로 없었던 듯 보였다. 이처럼 양준혁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전력질주는 팬들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많은 것을 느끼게도 하지만, 때론 공식기록원을 아주 곤혹스런 상황에 빠뜨리기도 하는 짓궂은 얼굴도 함께 가지고 있다. 타구의 코스나 강약이 완벽한 안타성 성질을 띠고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 평범해 보이는 타구가 나왔을 때 내야수가 앞으로 대시를 하지 않는 등의 안이한 수비를 하다 나중에 급해져 악송구가 나왔을 경우, 양준혁의 타구에 대한 실책과 안타판정의 기준이 상당히 모호해지게 되버리곤 한다. 평범한 땅볼이나 플라이 때 상당수의 타자들이 그럭저럭 달려나가지만 양준혁의 경우는 타구의 성질에 관계없이 1루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나가기 때문에 간혹 이런 난감한 상황을 만나게 된다. 실제로 야수가 대시를 못해 땅볼타구의 바운드 하나를 더 시키게 되면 타자주자를 1루에서 아웃시킬 확률은 현저히 줄어든다. 특히나 양준혁처럼 전력으로 뛰어나가는 선수라면 더더욱 그렇다. 필자의 경우도 양준혁의 전력질주에 혹해서 빼앗긴(?) 내야안타가 몇 개는 되는 것 같다. (대신 잘 맞은 타구를 빼앗아온 것도 있지만) 2000안타를 기준으로 양준혁의 내야안타 수는 135개다. 이중 상당수가 전력질주로 얻어진 안타라고 볼 수 있다. 2루타(현재 412개)에서도 양준혁의 전력질주는 빛을 발한다. 단타성 타구를 쳐 놓고도 1루에 만족하지 않고 틈만 보이면 2루까지 노리는 주루플레이를 한다. 올 시즌 역시 26개의 2루타로 LG의 김상현과 함께 최다를 기록 중이다. 양준혁은 또 하나의 기념비적 이정표를 향해 항진 중이다. 장종훈이 가지고있는 개인통산 최다홈런 기록인 340홈런을 깨기 위해 소리없이…. 현재 그의 기록은 329홈런. 타이기록까지 11개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올 시즌 내 돌파는 어렵겠지만 내년 시즌 초반 또 한번 야구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 2000안타 돌파 후, 3000안타를 목표로 한다는 꽤나 힘겨워 보이는 욕심(?)을 내비친 양준혁이 은퇴하는 시점이 언제쯤일지도 관심사지만, 그가 이뤄낼 기록의 끝이 과연 어디일지도 자못 궁금해진다. 이제까지 그가 이루어냈고 앞으로 이뤄낼 수많은 기록들이 그의 기량으로 일궈낸 것들이겠지만, 기량 외에도 매 순간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왔던 그의 마음가짐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양준혁은 불가능했을런 지도 모른다. 지금도 대구야구장 외야 담장 양쪽으로 길게 걸려있는 양준혁의 각종 타격기록 현황판이 그의 방망이와 발걸음에 따라 분주히 돌아가고 있다. 그의 야구인생을 숫자로 바꿔 표현한 그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기록 현황판에 도저히 나타나지 않는 그의 야구에 대한 진지함과 최선이야말로 진정 양준혁의 전부임을, 숫자가 아닌 몸짓을 통해서 오늘도 그는 팬들 앞에 증명해 보이는 중이다. 기록은 오히려 그 부산물일 뿐이라는 듯.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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