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기록의 사각지대, ‘본헤드 플레이’
OSEN 기자
발행 2007.08.16 14: 10

초등학교 운동회를 하는 날이면 꼭 빠지지 않는 종목에 속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박 터뜨리기’다. 아이들이 콩이나 모래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위로 던져 허공에 달린 박을 맞추고 나면 얼마 후, 박이 갈라지면서 그 안에 있던 뭔가가 뒤섞여 우루루 쏟아져 내리게 된다. 지난 8월 11일 잠실과 문학구장의 두 경기에서는 마치 박이 터지듯, 프로에 어울리지 않는 야수들의 희귀한 실책성 플레이들이 한꺼번에 다량으로 쏟아져 나왔는데, 그 실수에 대한 문책이라고 할 수 있는 실책기록이 때에 따라서는 전혀 기록지에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공식기록의 한계를 다시 한번 절감한 하루였다. 특히 잠실 두산과 롯데의 경기에선 롯데의 중견수 이인구가 2회와 3회에 걸쳐 두산 김동주와 민병헌의 평범한 플라이 타구 두 개를 낙구지점 판단미스와 때 늦은 양보성 플레이로 연거푸 안타로 만들어주면서 결국 팀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는데, 이인구의 어이없는 수비실수가 공식기록상으로는 아무 잘못도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같은 날, 문학서 열린 SK와 한화의 경기에서도 한화 김민재와 김인철이 각각 희귀성 실수를 저질러 역시 팀을 곤경에 빠뜨렸다. 2회초 수비 때, 유격수 김민재는 이호준(SK)의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를 잡고 글러브를 들어올리며 심판원을 향해 땅에 닿기 전 바로 잡았다는 의사표시를 했지만, 심판원이 이를 원바운드 포구로 인정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타자주자를 살려 내보낸 수비실수를 저질렀다. 이 경기의 공식기록을 담당했던 필자 역시도 원바운드 타구로 판단한 상태였다. 한편 김민재와 한화 코칭스태프의 어필이 뒤따르는 동안, 김민재가 타구를 잡고 송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 사이에 1루로 살아나간 이호준의 기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를 놓고 한동안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일찍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로서는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호준을 유격수 실책에 의한 출루로 판정을 내렸다. 야수의 본 헤드 플레이는 대부분 기록상 실책으로 기록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는 달라 보였다. 심판원의 어떤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야수는 일단 최선의 플레이를 했어야 했다. 선수 자신이 지레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려놓고 플레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령 겉으로 드러난 동작으로는 아무런 실수가 없었다 하더라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루에 나가있던 SK의 김경기 코치도 이 상황에서의 실책판정이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선수가 아무런 플레이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실책이 기록될 수 있는 지를 물어왔다. 아마도 내야안타를 염두에 뒀던 모양이다. 실책관련 규칙에 이런 문구가 있다. 마땅히 송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송구를 하지 않았을 경우에 실책으로 기록할 수 있다는…. 이후에도 투수와 야수들의 잇따른 실책으로 다 잡았던 경기를 놓치고 연장에까지 내몰린 한화는 10회말 승부를 가름짓는 또 한번의 보기 드문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1사 1루 상황에서 정경배의 좌전안타 때, 타구를 잡은 좌익수 김인철이 3루까지 파고든 정근우가 설마 홈까지 들어가겠냐는 안일한 마음에 공을 빨리 내야로 전달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었고, 이 틈을 노린 정근우의 재치있는 주루플레이에 끝내기 한판을 허용해 버린 것이다. 또 한번의 고민 끝에 이 상황 역시 좌익수의 실책으로 기록.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이 끝내기 상황을 기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없었다. 야수가 플레이를 하지 못한 것은 비슷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김인철의 공을 받아줘야 할 내야수가 아무도 김인철을 향하지 않고 있는 바람에 던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열한 세 가지 경우의 실수를 종합해보면, 결국 현장 중심의 야구적인 실수와 이론 중심의 기록적인 실책의 경계선을 어디에 두느냐가 관건이었다. 야구적인 실수는 말 그대로 당연히 선수가 해 줘야 하는 상황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이 처리해야 할 부분을 다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팀에서 선수 개개인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모두 점수를 매기는 고과가 이에 속한다. 반면 기록적인 실책은 야수의 실책에 대해 규칙에 따른 범위를 따로 정해놓고 이에 어긋나는 경우에만 실책으로 기록하도록 정해 놓은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공을 잡으려다 놓치거나 악송구를 하는 등의 수비실수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실책으로 기록하도록 되어 있지만, 야수의 낙구지점 판단 착오나 베이스 커버를 소홀히 하는 등의 플레이적인 미스에 대해서는 실책으로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현행 규칙이자 그라운드의 야구정서다. 2005년 7월, 9회 말 1사까지 끌고 갔던 롯데 장원준의 불발로 끝난 노히트노런도 결국 투수 자신의 1루 베이스 커버 미스로 인한 것이었다. 현행 공식기록에 있어서는 이러한 야수의 생각 잘못으로 인한 두뇌적 오류 등은 실책으로 기록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이론 중심의 ‘기록위주 기록’과 현장 중심의 ‘야구위주 기록’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공식기록이라는 것의 본질은 선수에 대한 고과차원이나 코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눈은 아니다. 야구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이 커다란 대의명분이고, 기록을 통한 여러가지 통계자료를 언론과 팬에게 제공한다는 것이 그 다음 명분이다. 하지만 야구기술이 발전하고 선수나 코칭스태프는 물론, 팬들의 야구 보는 눈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기존의 공식기록 판단기준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이론으로 주저앉는 경우도 간혹 생기게 된다.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이 기존의 이론 틀을 야구적으로 모두 뒤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기록규칙들을 보완하고 재정비하는 과정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1990년대 초반에 비해 지금의 공식 기록판정은 알게 모르게 기술적으로 상당히 진전된 부분이 많다. 대부분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는 부분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다. 1845년에 창안된 야구규칙이 오랜 기간 동안 그 변천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른 것처럼, 기록규칙과 판정도 그 변화의 과정에 시간적인 요소는 필수다. 물론 그 변화에 완성이라든가 종착역은 없다. 야구가 계속되는 한, 경기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야구 기록규칙이나 판정 또한 달팽이가 기어가듯 느리지만, 끊임없는 변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모를 일이다. 이인구의 낙구지점 판단착오와 같은, 지금은 기록지에 남지 않는 실수가 공식적인 실책으로 기록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될는 지도….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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