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7일, 서울 코엑스 인터콘티넨탈호텔에는 두 골리앗이 한자리에 있었다. 약 3년만이라는 신구 골리앗이 대면을 했고, 취재진이 함께 포즈를 취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의 눈빛은 서로가 딴 곳을 향하고 있었다. 9월 29일 서울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열리는 K-1 월드 그랑프리 개막전에 나서는 최홍만(28)의 대진 상대 발표에 이어 K-1 진출 이후 첫 공식 석상에 모습을 나타낸 김영현(31)이 소개 되었다. 씨름판에서의 마지막 만남 이후 한번도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 적이 없다고 김영현 선수는 밝혔다. 그렇다면 공식적인 자리에는 마주친 적이 있었을까? 그 때도 이렇게 어색함과 싸늘함이 있었을까? 어찌 되었던 이 둘은 민속씨름이 아닌 이종 격투기의 기자회견장에서 만났다. 수 년간 최고의 자리를 번갈아 가며 씨름의 흥행에 일각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업종 전환’을 해 한 명은 한창 건강 이상설로 예민할 대로 예민해 있고, 또 한 명은 50여 명의 카메라와 질문이 이어지는 회견장의 분위기를 적응하지 못해서인지 입을 꾹 다물고 짧은 답변만을 되풀이 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자회견은 40여분간 진행이 되었지만 둘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기회는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취재진의 긴 질문에 성의를 보이는 자세로 20초 정도라도 말을 이어주면 하는 바람이 어김없이 빗나갔다. 설마 하면서 기자회견은 그렇게 끝났다. 둘은 끝까지 말을 아꼈다. 기자회견을 마친 김영현 선수를 따로 만났다. ‘검정색 정장 차림이 회사에 첫 출근하는 신입사원 같다’며 컨셉을 묻자,“맞죠! 첫 출근이죠. 잘 입지않는 양복을 꺼내 입었습니다. 특별한 건 없고 젊잖은 컨셉이라 할 수 있죠.” “첫 공식 기자회견인데 질문의 답을 좀 길게 하시지 그랬어요? 데뷔 소감이나 훈련 과정을 설명한다거나 혹은 어떻게 해 보이겠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방송에 담을 내용이 빈약하다며 투덜거리는 필자의 얼굴을 보며 김영현은 “제가 지금 입장에서는 지금 뭐라고 말하기가 좀 그래요. 뭐 경기를 뛰고 난 것도 아니고, 그냥 데뷔했습니다 정도잖아요. 아직 보여 드린 게 없잖아요. 경기를 뛰고 난 후라면 이렇다 저렇다 제 생각을 전하겠는데 현재로는 데뷔를 했으니까 열심히 하겠노라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얘기가 없네요.”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기자회견에서 조차 말을 아낀 이유였다. 긴장한 것이 아니냐고 되물어도 아니라면서 말이다. “아직 보여준 게 없고 또 연습을 어떻게 했다 하고 꺼내기도 뭐하고 선수는 실력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뿔싸! 원하는 멘트 만을 쏙쏙 빼내기 위한 형식적인 인터뷰에 필자 자신이 너무 물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구절절 자극적이고 강한 파이터의 이미지를 바랐는 지도 모른다. 최홍만을 향해 도전장을 내미는 흥미위주의 내용이 쏟아지길 은연중에 기대했던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자신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도 내릴 수 없는 입처지라는 김영현은 훈련 중에 간간이 자신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다며 속을 털어놓기도 했다.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아직 잘 모르겠네요.”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공선택 관장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짧은 대답으로 취재진이 허탈한 웃음만 짓고 있지 않느냐며 공선택 관장에게 물어봤다. “원래 말수가 없잖아요(흐흐).” K-1, 엔터테이먼트 요소가 강한 종목이다. 현란한 몸짓과 제스쳐 그리고 오버하는 모습을 관중들은 원한다. 아직은 데뷔 전 공식 자리기에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김영현을 이해하는 쪽이긴 하지만 쇼맨 쉽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다. 보여주는 것. 이미 그는 상당히 체계적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전해 들을 수 있다. 꼼꼼하고 완벽주의자인 그가 선택한 길에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으며 계획대로 훈련으로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지금이 오히려 폭풍전야일지도 모른다. 그 날 기자회견에 함께 참석한 다니카와 사다하루 총괄프로듀서는 최홍만과 김영현, 둘의 맞대결 가능성에 대해 “그 시기는 김영현이 얼마나 잘하는가에 달려있고 내년 또는 내후년에 그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 때쯤이면 김영현의 거침없는 발언을 들을 수 있을까? 혹은 데뷔 전을 치르고 난 후엔 술술 이야기가 나올까? 필자 혼자 생각해 본다. 씨름과는 다른 분위기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모래판이 아닌 화려한 조명과 옆 사람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시끄러운 분위기까지 적응하는데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라고. 데뷔전의 상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상대가 누가 되던지 간에 김영현의 성공적인 데뷔전의 제물이 되었음 좋겠다. 그래서 원체 달변인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화제가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홍희정 KBS 스포츠 전문 리포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