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초까지만 해도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이현곤(27. KIA)의 독주로 끝날 것만 같았던 2007 프로야구 수위타자 자리다툼이 대 혼전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난 20일 전년도 수위타자인 롯데의 이대호(25)가, 경기가 없는 관계로 무방비상태(?)였던 이현곤을 거의 두 달 만에 2위 자리로 밀어내며 잠시나마 선두탈환에 성공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삼성 양준혁(38)이 추석 연휴기간 동안 5할에 육박하는 13타수 6안타를 몰아치며 앞서가던 이현곤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9월 28일 현재, 선두로 나선 양준혁( .338)과 3위 이대호( .335)의 타율차이는 불과 3리. 이들 세 팀의 남은 경기수는 5~7경기. 이제부터는 한 경기의 경기결과에 따라 판세가 하루가 멀다 하고 요동을 칠 판이다. 대개 시즌 말미에는 팀 순위나 개인 성적들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기 마련. 그러다 보면 잔여경기를 마치 시범경기나 번외경기 치르듯 큰 부담없이 마주할 수 있었는데, 올해엔 치열한 수위타자 경쟁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통에 어림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물론 다른 타이틀도 기록원의 결정에 따라 영향을 받긴 하지만, 타격부문의 간판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는 수위타자 부문은 타구판정을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결과가 순간순간 바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록원들이 느끼는 부담의 정도는 생각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시즌 막판에 이처럼 기록원 머리를 쥐나게 했던 경우는 과거 몇 번이나 있었을까? 올해처럼 수위타자 경쟁이 5리(0.005) 이내에서 결판이 났던 경우는 모두 7번이다. 9연타석 고의4구라는 엽기적인 기록이 탄생했던 1984년 이만수(삼성, .340)와 홍문종(롯데, .339)의 타격왕 경쟁을 시작으로, 느슨한 번트수비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1988년 김상훈(MBC, .354)과 김성래(삼성, .350)의 대결. 덕아웃에서 전자계산기를 놓고 실시간으로 타율을 계산하느라 부산했던 1989년 고원부(빙그레, .327)와 강기웅(삼성, .322)의 대결 등은 당시 세간의 안주거리로 등장했던 타격왕 다툼이었다. 한편 역대 가장 치열했던 타격왕 싸움은 1990년으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다. 그 해 한대화(해태)와 이강돈(빙그레)의 수위타자 경쟁은 보통 할,푼,리로 끝나는 상식적인 타율계산 방식으로도 결판이 나질 않았던 경우다. 당시 한대화와 이강돈은 똑같이 3할3푼5리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소수점 4자리까지 구하고 사사오입(四捨五入)한다는 규칙을 적용한 결과, 1모차이(.3349 - .3348)로 한대화가 이강돈을 누르고 타격왕에 등극할 수 있었다. 이 두 선수 말고도 노찬엽(MBC)이 막판 규정타석을 채우며 타이틀 싸움에 뛰어들었지만 3할3푼3리의 타율에 머물고 말았다. 노찬엽을 포함한 이 세 선수의 타율 레이스는 마지막 1주일간 1위 자리가 3번이나 뒤바뀌는 대 혼전이었는데, 이전 몇몇의 경우와는 달리 비교적 끝까지 페어플레이가 펼쳐졌던 해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1991년 이정훈(빙그레, .348)과 장효조(롯데, .347)의 경쟁은 방관자적 처지가 아닌 기록원으로서 현장에서 수위타자 경쟁과 직접 부딪쳐야 했는데,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태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이정훈의 3연타석 번트 내야안타를 돌이켜보면 지금도 가슴이 콩닥콩닥 댄다. 그 후 한동안(9년간)은 치열한 경쟁 없이 일찌감치 타격왕이 결정되었지만 2000년에 이르러 또 한번의 과열(?) 양상을 띠게 된다. 박종호(현대, .340), 김동주(두산, .339), 브리또(SK)와 송지만(한화, 이상 .338) 등 모두 4명이 막판까지 수위타자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던 것이다. 시즌이 끝났을 때 이들 네 선수의 타율차이는 불과 2리. 하지만 대미는 브리또가 한국을 떠나고 박종호가 벤치를 지키면서 타율싸움은 겉모습과 달리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마지막 접전은 2004년이었다. 한때 타율 4할에 육박하며 고공비행을 하던 이진영(SK, .342)의 페이스가 쳐지면서 브룸바(현대, .343)가 왕좌를 낚아채던 해다. 이상 프로야구 출범(1982)이후 지난 25년간 타격1위 자리를 놓고 뜨거운 경쟁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을 되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간 타격왕을 네 차례나 차지(1993, 1996, 1998, 2001)했던 양준혁도 이런 접전은 처음이다. 나이를 감안할 때 이런 기회가 또 오리라는 장담 할 수 없는 처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권좌에 오르고 싶을 것이고, 일취월장한 타격솜씨로 지금까지 공들여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는 이현곤도 마찬가지일 터. 마지막에 웃는 자가 그 누구이건 타격왕 도전사에 길이 교훈으로 남을 수 있는 명승부로 끝맺음 될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2000년 브리또가 마지막 경기에서 3타수 2안타를 기록하면 타격왕에 오를 수도 있었던 기회를 끝내 포기하고 출국을 선택하고 말았던 아픈 기억들은 다신 없어야 한다. 그것이 11년 만에 400만 관중을 돌파할 수 있도록 성원해 준 팬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2007년도 수위타자 보다도 당당한 2위가 누가 될 것인지가 오히려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