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용두사미로 끝난 2007 타격왕 경쟁
OSEN 기자
발행 2007.10.09 13: 58

너무도 치열한 싸움이었다. 2007 수위타자 자리를 놓고 세 선수가 벌인 타율경쟁은 적어도 겉으로 만큼은 그랬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정국이던 지난 10월 2일, 양준혁(삼성)은 SK와의 문학경기에서 3타수 2안타를 기록하며 이현곤을 제치고 타격 1위로 올라섰다. 그 때 타율이 3할3푼4리8모. 경기가 없었던 이현곤(KIA)도 3할3푼4리8모였다. 어쩔 수 없이 그 다음 단위인 ‘사’까지 따져야 했고, 양준혁은 ‘6사’로 ‘2사’였던 이현곤을 앞지를 수 있었다. 역대 타격왕 싸움에서 무려 소수점 다섯째 자리까지 계산해야 했던 적은 일찌기 없었다. 대개 할, 푼, 리로 통용되는 타율에서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같아 ‘모’라고 불리는 넷째 자리까지 구해야 하는 경우야 가끔 생기긴 하지만 이마저도 똑같아 다섯째 자리인 ‘사’까지 따져봐야 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다음날인 3일, 선두로 나선 양준혁이 타율관리 의혹 속에 스타팅 멤버에서 빠진 사이, 2위로 밀려난 이현곤은 광주 LG전에서 3타수 3안타를 몰아치며 선두를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다급해진 양준혁이 뒤늦은 시동을 걸고 나섰지만 이날은 결국 타격왕 싸움의 향배를 가름짓는 분수령이 되고 말았다. 양준혁에게도 마지막 기회는 있었다. 소속팀 삼성의 시즌 최종전이 벌어지던 10월 5일, 사직 롯데전에서 3타수 2안타를 기록하면 이현곤(.3385)을 4모 차이로 앞지를 수 있었지만, 마지막 타석(2타수 1안타 기록 중)이던 8회초 롯데의 원포인트 릴리프 김이슬(23)이 볼넷을 주는(?) 바람에 허무하게 타격왕의 꿈을 접어야 했다. 비록 몇 경기 나오지는 않았지만 김이슬이 볼넷으로 타자를 출루시킨 것은 하필 이날 양준혁이 처음이었다. 반대급부였을까? 4타수 4안타를 치면 0.3389로 타격 1위가 가능했던 이대호 역시 2회 삼성으로부터 스트레이트 볼넷을 얻어 출루하는 바람에 타수를 채우기가 어려워지면서 사실상 타격 1위에 대한 미련을 접어야 했다. 온 신경을 집중시켰던 롯데와 삼성의 마지막 경기는 볼넷으로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은 끝에 그렇게 끝이 났다. 이를 광주에서 TV로 지켜보던 이현곤으로선 그제서야 타격왕 당선(?)의 기쁨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공교롭게 롯데와 삼성의 사직 2연전과 10월 7일 KIA의 광주 최종전을 모두 따라다니게 되었던 필자로서도 마지막 남은 광주 경기에 대한 부담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사실 이번처럼 접전 속 타율 싸움에선 매 타석 당사자들이 갖게 되는 부담의 크기가 작지 않지만, 기록원이 느껴야 하는 압박감도 상당한 편이다. 더군다나 경쟁관계에 있는 두 팀이 같이 맞붙는 날엔 더더욱 그렇다. 타율 싸움에 관련된 선수의 타구가 조금이라도 애매한 날이면 그야말로 기록원에겐 지옥이 따로 없다. 시계바늘을 잠시만 거꾸로 놓아보자. 5일 롯데와 삼성의 사직경기로. 이날 4타수 4안타 이상의 맹타를 친다면 타격 선두도 가능했던 3위 이대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1타수 1안타를 기록 중이던 5회말이었다. 타구가 3루수 앞으로 날아갔다. 그런대로 잘 맞은 타구였지만 3루수가 처리도 가능해 보이는 타구였다. 하지만 마지막 바운드에서 타구가 약간 가라앉자 이를 잡으려던 김재걸은 자세를 낮추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었고, 글러브를 내밀었지만 타구는 글러브를 튕겨 나오고 말았다. 늘 걱정하던 그런 상황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현곤을 바짝 추격하던 양준혁의 타구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평소 같으면 실책으로 판정할 수도 있는 성격의 타구였지만, 정황이 정황인지라 수비수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민감하게 부각되어 보였다. 이대호의 기록이 2타수 2안타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6회초 선두타자로 나서야 하는 양준혁이 기록실 앞을 슬쩍 지나치며 짐짓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느 때와는 달리 그 시점에서 양준혁이 던진 미소는 기록원에겐 부담 백배의 폭탄과도 같은 미소일 수 밖에 없었다. “확실한 걸로 쳐야 돼!”. 안타를 치려면 기록원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타구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던진 말에 무언의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양준혁은 타석으로 들어갔다.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 일인가…’. 시간여행은 이쯤에서 접어두자. 물론 이현곤이 아직 치러지지 않은 한화와의 마지막 홈경기를 남겨두고 있긴 하지만, 1타수 무안타까지는 타율 선두를 유지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첫 타석 결과에 따라 탄력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 경기 출장이라는 부차적인 목표까지도 달성 가능한 상황이다. 그저 형식만 남은 셈이다. 2007 수위타자 자리를 놓고 종반 뜨겁게 벌어졌던 타율싸움은 이렇듯 서로 치고 빠지는, 마치 ‘아웃복싱’과도 같은 흐름으로 전개된 끝에 용두사미(龍頭蛇尾)격으로 흐지부지한 결말을 맺게 되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테드 윌리엄스(1941년, 보스턴 레드삭스)가 타율 4할을 지키기보다 마지막 날 벌어진 더블헤더에 감독의 만류를 무릅쓰고 출전해 8타수 6안타를 몰아치며 타율을 오히려 4할6리까지 끌어 올렸던 일화가 갑자기 부러워진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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