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토요일 오후. 한창 데이트 약속이 잡혀 있을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의 연령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길쭉한 공을 품 안에 소중히 안고 거친 숨을 내뿜으며 무리 속을 넘고 또 넘는다. 중간중간 노랑머리의 체격이 단단한 외국인의 모습도 보인다. 쌀쌀한 늦가을의 낙엽이 흩날리고 있는 11월 3일 이화여대 운동장의 전경이다. 올해 7월부터 모여 운동을 시작한 이들은 마침내 10월 1일 국내 선수 6명과 외국인 선수 4명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럭비 팀의 창단 멤버로 이름을 알렸다. 그 다음날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날아가 엿새간 ‘아시아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해 세계 여자럭비의 높은 벽을 몸소 체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다녀온 선수들은 한결같이 큰 경험이 되었고 도전할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전했다. 일신여상에서 배구선수로 뛰었던 채규연(24. 대학원생)은 모든 스포츠는 같다고 말한다. “제가 했던 배구는 상대와 직접적인 접촉은 없지만 공을 향해 코트에 몸을 던지고 부딪치는 경우는 많잖아요. 똑같아요. 럭비가 상대편 선수와 몸싸움을 하지만 역시 룰 안에서 하는 스포츠예요. 기본 기술을 익히고 나면 그리 거칠 건 없다고 봐요. 선수들의 실력이요? 예전에 여러 종목의 선수 출신이어서 인지 운동 신경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아요. 다만 럭비의 잔기술이나 기본기가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이죠. 일주일에 한번 모여 하고 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이제 모인지 겨우 3개월인 걸요?” 필자가 럭비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외국인과 국내선수들의 실력 차는 한눈에 보였다. 일단 거침 없어 보이는 외국인들의 몸놀림은 재빨랐고 상대적으로 국내 선수들은 그들에 비해 소극적이었다. 아직은 태클이나 스크럼 자체가 어색한 국내선수들은 이따금 짧고 작은 비명소리를 내며 버거워 했다. 여느 훈련현장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웃음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겹쳐 진다는 점이다. 긴장감은 있으나 즐기는 분위기다. 호주 미국 등의 국적을 갖고 있는 외국인의 경우는 국내에서 체류하면서 어엿한 직업을 갖고 있는 동호인들이다. 이들은 한국에 럭비를 알리고 스스로 즐기기 위해 참가한 것에 반해 우리 선수들은 초보수준을 넘기 위한 단계를 한창 밟고 있는 과정이다. 국제럭비위원회(IRB)의 허락으로 국내거주 3년 이상의 외국인을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뛸 수 있게 했고 그래서 겨우 최소 구성인원을 꾸릴 수 있었다. 태극기가 붙어 있는 유니폼을 입은 노랑머리 외국인 영어학원 강사가 한국대표로 대회에 나설 것을 상상하니 어색하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지만 임한수(33. 양정고 코치) 코치는 현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직 선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그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기술 면에서 많이 배우고 있죠. 럭비가 워낙 비인기종목이다 보니 지원하는 단체도 없고 홍보도 없어 뛰겠다는 선수가 없거든요.” 일주일에 한번만 모여 훈련을 하는 이유 역시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선수마다 자신의 생업이 있기 때문에 팀 훈련 스케줄을 맞추기 힘들다고 그는 덧붙였다. 야구를 포함해 각종 구기 스포츠가 외국에서 들어왔던 당시에도 전달자의 노릇이 컸다는 점에서 지금의 여자 럭비 팀으로서는 이들은 한없이 고마운 존재이다. 여자 럭비팀의 창단의 주도적인 구실을 한 서호정(27) 씨는 현재 팀의 주무이자 선수로 뛰고 있다. 외국인과 함께 훈련을 하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선수들로만 구성된 팀을 꾸려야 할 것이라며 그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대학시절 골프를 전공했고 졸업 후 올해 6월 대한럭비협회의 행정 직원으로 입사했다는 서호정 씨는 “럭비라는 스포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제는‘럭비 전도사’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했다. 골프와 럭비를 모두 해본 처지에서 두 운동을 비교해 보라는 질문을 던지자 팀을 이뤄 경기를 하는 럭비가 개인 운동인 골프보다 재미 있다고 전했다. 상대와 몸을 부딪치면서 묘한 희열도 느낀다고 했다. 태권도를 전공했다는 이민희(20. 한양대 체육과 2년)는 체격이 굳이 크지 않아도 가능한 것 같다며 충분히 해 낼 수 있는 운동이라고 소개했다. “저희가 럭비 1세대인 만큼 자부심도 다들 큽니다. 목표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거죠!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반드시 이뤄 내야죠. 저희가 못하면 다음세대에서요.” 한국여자 선수의 능력은 무한하다. 이미 여자 핸드볼, 여자 하키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체격의 열등함을 혹독한 맹훈련으로 넘어섰고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팀워크를 이뤄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여자 럭비 팀의 비약적인 발전을 꿈꿔 본다. 홍희정 KBS 스포츠 전문 리포터 여자럭비 대표팀의 이민희, 서호정, 주현희, 채규연(왼쪽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