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승부와 에티켓은 두 마리 토끼
OSEN 기자
발행 2007.12.12 13: 40

지금은 한 물 갔지만 과거엔 대표적인 프로스포츠로서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프로복싱. 뜬금없이 권투이야기부터 꺼낸 이유는 자신보다 강한 자와의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 싸움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지를 면전에서 가장 단적이고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강한 주먹을 가진 상대에게 인파이터 스타일로 대든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 때문에 상대적 약자는 외곽을 빙빙 돌며 치고 빠지는 식의 경기운영을 하게 된다. 이를 줄곧 따라다녀야 하는 인 파이터의 처지에서 볼 때, 당당하게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는 아웃복서는 얄미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경기가 끝나고 난 뒤, ‘닭 쫓던 강아지’ 꼴로 점수에서 뒤져 판정패를 당한 인파이터가 종종 독이 올라 내뱉는 말이 있다. “상대가 비겁하게 너무 도망만 다녔다.”라고…. 이번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예선(대만)전에 출전했던 한국 야구대표팀의 대 일본 전 오더 변경 건을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경기 개시 1시간 전 발표한 오더에서 선발투수를 포함한 무려 7명의 이름과 타순을, 경기를 불과 10분 앞둔 시점에서 대폭 바꾼 사실에 대한 정당성 여부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이러한 해프닝이 일어난 이유는 오더를 두 차례(1시간 전과 10분 전)에 걸쳐 제출(변경도 가능)하도록 만든 대회규정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에 비해 상대적 열세를 절감하고 있던 한국팀은 이러한 규정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오더 변경을 통해 전력의 열세를 보완할 수 있는 길이 보이자 그 길을 택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더욱이 앞서의 대만 전에 가장 믿을만한 류현진과 박찬호를 한꺼번에 투입하며 올인했던 터라 최강 일본과 상대하는 대표팀으로서는 대응할 만한 뾰족한 수가 궁색한 상황이기도 했다. 물론 몰랐다 하더라도 경기 개시가 임박한 시점에 가서 종전 타순을 대대적으로 변경한 것은 국제관례상으로 볼 때 ‘오소독스(orthodox)’한 방법은 아니었다. (대 일본전의 오더 변경에 대한 기록적인 해석은 다음 편에 다루기로 한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상대선발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도 있는 현 규정(두 차례의 오더 제출)의 문제점을 대표팀은 이미 감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갈림길에서 결국 에티켓보다는 승부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야구에서 흔히 말하는 ‘에티켓’이란 문서로 된 규칙이나 규정이 아닌, 가능하면 지켜주었으면 하는 최소한의 도덕적인 예의를 뜻한다. 언제부턴가 말로 전해져 내려오는 ‘에티켓 10계명’이란 불문율도 있긴 하지만, 때때로 현장에서는 승부나 실리 앞에 공염불이 되는 일을 자주 보게 된다. 많은 점수차로 이기고 있을 때 도루나 번트를 하지 말라고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벤치는 에티켓에 반하는 무리수를 둔다. 노히트 노런이나 퍼펙트 경기 등의 대기록이 진행중인 종반엔 기습번트를 시도하지 말라고 에티켓엔 나와 있지만, 치욕스런 기록의 희생양으로 궁지에 몰린 팀 앞에서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2000년 9월 16일, 11-0의 상황에서 9회 1사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고 있던 김수경(현대)의 대기록을 무참히 깨어버린 타바레스(해태)의 기습번트. 가깝게는 SK와 두산의 2007 한국시리즈 3차전서, 7-0으로 리드하고 있던 SK 정근우의 홈스틸(공식기록은 패스트 볼로 처리됨)시도 등은 야구의 에티켓과 다급한 팀 사정이 현장에서 충돌한 사례들이다. 에티켓을 지키면서 승부에서도 이길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는 전력에서 월등한 우위에 있어야 하고, 이겨야 하는 스포츠의 세계에서 이기는데 초연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치열했던 순위다툼을 잠시 잊고 한여름 밤 사심(私心)없이 어우러지는 ‘올스타 전’은 대표적인 야구 에티켓 실현의 장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승부에 죽고 사는 현실로 돌아오면 또다시 에티켓보다는 승부에 더 연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저간의 사정이다. 프로의 세계에서, 경쟁의 사회에서 ‘에티켓과 승부’는 마치 정형(orthodox)과 일탈(heterodox), 인파이터와 아웃복서의 대립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두 마리의 토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